마음에 와닿은 시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정호승 시인은 때로 윤동주에 때로는 소월에 또 어떤 때는 한용운에 비교된다. 그만큼 비교의 대상을 많이 가진 시인도 많지 않으리라. 그렇듯 그의 시세계는 맑고 순수하며 어딘지 우리의 피를 당기는 음악성을 가지고 있고 간결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치 않은 역설의 시 문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렇듯 그의 시에는 '맑음의 참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선(禪)'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냥 맑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되는 것들, 이를테면 더럽고 진부하고 낡고 오염되어 있는 세속의 그 어떤 진창들을 참혹하게 뿌리침으로써 바로 그 순간 순결한 날개가 솟아나는 것처럼 '획득'하게 된 맑음이기 때문에 '맑음의 참혹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역설적인 정신의 경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맑음의 참혹성은 자본주의의 사창가에 살고 있는 병든 우리의 썩은 영혼을 단번에 절벽에서 무너뜨리는 것 같은 세속 파괴의 힘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절벽에 당도한 사람이 죽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껴안아야 할 한아름의 허공 같은 피 흘리는 사랑의 신성(神聖)함도 가지고 있다. 모가지가 달아난 돌부처 위에 얹힌 그의 얼굴이 웃고 있다. 그런 미소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을 것들을 죽였어야 했을까.
김승희 시인의 시평이다. '맑음의 참혹성'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참혹하도록 맑은 정호승의 시들을 만나 보자.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시평은 시평일 뿐. 자신만의 감성으로 시를 느끼는 것이 최상의 시 감상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 지어 빠져나갑니다
- 정호승, <하늘의 그물> -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호승, <햇살에게> -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손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먼 길을 가는 동안
평생 울지 않고 갑니다
- 정호승, <그림자> -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봄비 그친 뒤
지리산으로 가 보라
지리산 능선 위에
학이 앉아 웃고 있다
- 정호승, <종이학> -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신 큰스님을 다비*하는
불꽃인간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 정호승, <낙화> -
*다비(茶毘):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이르는 말. 육신을 원래 이루어진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 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에 참석해서
떨리는 숟가락으로 심각하게
옥수수죽 한 그릇을 다 먹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을 먹는다
북한에서는 옥수숫대까지 한꺼번에 갈아 죽을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중학생 막내아들에게 하면서
그것도 못 먹어 굶어 죽기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쌀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나는 그런 놈이다
- 정호승, <옥수수죽 한 그릇> -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정호승, <술 한잔>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선암사> -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 정호승, <뿌리의 길> -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 정호승, <나무에 대하여> -
보슬비 내릴 때
빗방울 위에
나팔꽃 필 때
꽃이파리 위에
함박눈 내릴 때
눈송이 위에
어둠이 깊어갈 때
초승달 위에
소년 부처님
고요히 앉아
웃으시다
- 정호승, <소년 부처>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 정호승, <꽃을 보려면> -
소금물을 마시며
썩은 내 창자를 꺼내 나뭇가지에 걸어둔다
소금물을 마시며
썩은 내 위장을 꺼내 지붕 위에 널어둔다
날은 좋고 바람은 맑다
나는 좋은 일은 하지 않고 밥만 많이 먹었으나
봄이 와도 꽃나무 한 그루 심지 않았으나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나의 창자를
고맙게도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고 간다
지붕 위에 널어놓은 내 위장에
달빛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간
- 정호승, <소금물을 마시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