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박성우 신용목 엮음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에서

by 꿈강

기억한다

벼랑 위에서 풀을 뜯던 말의 목선을

그러나 알지 못한다

왜 그토록 머리를 깊이 숙여야 했는지

벼랑을 기어오르던 해풍이

왜 풀을 뜯고 있던 말의 갈기를 흔들었는지

서럭서럭 풀 뜯는 소리,

그때마다 왜 바다는 시퍼렇게 일렁였는지

밧줄은 보이지 않았지만

왜 말이 묶여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억한다, 말의 눈동자를

그러나 알지 못한다

말의 눈동자에 비친 풀이

왜 말의 입에서 짓이겨져야 했는지

- 나희덕, <기억한다, 그러나> -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

그 사람처럼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

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

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

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

그렇게 흔들렸던 세월

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누군가의 몸이 다시 앓을 그네

- 문동만, <그네> -



그래, 잘 견디고 있다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

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

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

그 하늘길로, 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타고 넘는다

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


아느냐?

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

- 이정록, <붉은 마침표> -



어느 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씨를 심었다


어느 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 정호승, <봄비> -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나는 무엇인가

놓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


너는 어디엔가

두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어디쯤에서 우린 돌아오지 않으려나보다

- 천양희, <어제> -



오후 4시 역광을 받고 담벼락에 휘는 그림자는 목이 가늘고

어깨가 좁다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타박타박 들어서는 골목


담장 너머엔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


저에게 들이친 폭설을 다 건너서야 가까스로 다다랐을 새 빛

대추나무 앙상한 외곽에서 저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멀까


잎새 한 잎, 침묵의 지문 맨 안쪽까지 돌기까지는 얼마나 아득한

깊이일까 글썽이는 수액이 피워 올린 그해 첫 연둣빛 불꽃까지는

- 조정인,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 도종환, <한 송이 꽃> -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버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찬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 박성우, <옛일> -



아버지, 읍내 나오시면 하굣길 늦은 오후 덕순루 데려가 당신은 보통, 아들은 곱빼기 짜장면 함께 먹습니다 짜장면 먹은 뒤 나란히 오후 6시 7분 출발하는 전북여객 시외버스 타고 집에 옵니다


배부른 중학생, 고개 쑥 빼고 검은 학생모자 꾹 눌러써 봅니다


어머니, 읍내 나오시면 시장통 국숫집 데려가 나는 먹었다며 아들 국수 곱빼기 시켜줍니다 국수 먹인 뒤 어머니, 아들에게 전북여객 타고 가라며 정거장으로 밀어냅니다 당신은 걸어가겠답니다


심술 난 중학생, 돌멩이 툭툭 차며 어머니 뒤따라 집에 옵니다

- 고광헌, <정읍 장날> -



방금 참새가 앉았다 날아간 목련나무 가지가 바르르 떨린다

잠시 후 닿아본 적 없는 우주의 따스한 빛이 거기에 머문다

- 이시영, <아침이 오다> -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 김선우,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



먹감색의

작은 호수 위로

여름 햇살

싱싱하다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 시간이 부러웠다

엄마가 어디 가셨니?

엄마가 어디 가셨니?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면

그중의 한 나무가

배고픈 나에게 물었다

- 곽재구, <무화과> -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

- 김주대, <부녀> -



좌판의 생선 대가리는

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


꽁지를 천천히 들어봐


꿈의 칠 할이 직장 꿈이라는

샐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

- 함민복, <금란시장> -



내소사를 지났다.

비 오고, 늦가을이다.

낙지들이 수조 속에서

한사코 다리를 비트는

곰소항 어느 횟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다.

나갔던 물이 들어온다.

저기가 고창이지요?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서요.

슬레이트 지붕 처마 끝에서

떨어진 낙숫물이

튄다.

신발이 젖는다.

생면부지,

전혀 모르는

사내다.

- 김용택, <소금> -



풀 비린내 푸릇푸릇한 젊은 스님은

법당 문 열어놓고 어디 가셨나


불러도

불러도

기척이 없다


매애

매애

풀 언덕에서 염소가


자기가 잡아먹었다며

똥구멍으로 염주알을 내놓고 있다

- 공광규, <운장암> -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 신경림, <별> -



아들과 함께 나란히 밤길을 걷다가 기도원 앞 다리께서 서로 눈이 맞아 달처럼 씨익 웃는다. 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안쓰럽다거나 어느새 거칠어진 내 숨소리가 마음 쓰여서만은 아닐 게다. 아마 나란히 걷는 이 밤길이 언젠가 아스라이 멀어져 갈 별빛과 이어져 있음을, 그리고 그 새벽에 차마 나누지 못할 서툰 작별의 말을 미리 웃음으로 삭히고 있다는 뜻일 게다. 아들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땐, 벙어리인 양, 서로 마주 보며, 많이 웃자.

- 이창기, <아들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땐> -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 박소란,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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