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서

by 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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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사는 일. 이런 마음먹기를 흔히 '작정(作定)'이라고 하지만, '작정(作情)'이라고 바꿔 적어본다. 돌봄을 위한 작정, 그것이 박준의 사랑이다.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렸다


밥상에는

다른 반찬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 박준, <삼월의 나무> -



방에

모로 누웠다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쑥을 뜯으러 가는 동안


나는 저녁으로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


내가 남도에서 자란

얼굴이 검고 종아리가 두꺼운 사내였다면


된장 대신 도다리 한 마리를 넣어

맑게 끓여냈을 수도 있다


낮부터 온 꿈에 그가 보였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것에 서운하다


서향집의

오후 빛은 궃기만 하고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워

신발을 길게 바닥에 끌며

들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 박준, <쑥국> -



한밤


울면서

우사 밖으로 나온 소들은

이곳에 묻혔습니다


냉이는 꽃 피면 끝이라고

서둘러 캐는 이곳 사람들도

여기만큼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냉이꽃이 소복을 입은 듯


희고


머지않아 자운영들이 와서

향을 피울 것입니다

- 박준, <문상> -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 한 말이었다

- 박준, <생활과 예보> -



올해 두 살 된 단비는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았다


딸이 넷이었고

아들이 둘이었다


한 마리는 인천으로

한 마리는 모래내로

한 마리는 또 천안으로


그렇게 가도

내색이 없다가


마지막 새끼를

보낸 날부터


단비는 집 안 곳곳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밤이면

마당에서 길게 울었고


새벽이면

올해 예순아홉 된 아버지와


멀리 방죽까지 나가

함께 울고 돌아왔다

- 박준, <단비> -



산간에 들어서야

안개는 빛과 나에게

품을 내어주었다


서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홍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

오래전 큰 병이 돌았고


해안으로 가면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인 곳도 있다


마을로 드는 길에서도

당신은 신록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사실 꽃 지고 열매 맺힌 이 길을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수국이 피어 있었고

다른 한번은 눈이 내렸다


근처에 넓은 목장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의 무렵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당신의 걸음은 빠르기만 했다

- 박준, <오름> -



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그 전까지 배추 파종을 마칠 것입니다 겨울이면 그 흰 배추로 만두소를 만들 것이고요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 박준, <메밀국수――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찜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든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것은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는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 박준, <호수 민박> -



게들은 내장부터 차가워진다


마을에서는 잡은 게를 바로 먹지 않고

맑은 물에 가둬 먹이를 주어가며

닷새며 열흘을 더 길러 살을 불린다


아이는 심부름길에 몰래

게를 꺼내 강물에 풀어준다


찬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가는 한밤에도


낮에 마주친 게들이 떠올라

한두 마리 더 집어 들고 강으로 간다

- 박준, <천변 아이> -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밥'이나 '우리'나 '엄마'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 박준, <숲> -



눈은 다시 내리고

나는 쌀을 씻으려

며칠 만에 집의 불을 켭니다


섣달이면 기흥에서

영아가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모처럼 얻는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난달에는 잔업이 많았고

지지난달에는 함께 일하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느라

서울 구경도 오랜만일 것입니다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


묵은해의 끝, 지금 내리는 이 눈도

머지않아 낡음을 내보이겠지만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

- 박준, <좋은 세상――영아> -



깊은 잠에 빠진 살은 차다


간장에 양지를 졸이는 꿈을

며칠 이어 꾼 것을 두고

나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으레 그럴 때면

외투를 한 겹 더 입었다


겨울옷들의 소매는 언제나 길고

나는 삐져나온 손끝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욕실의 치약과

굳은 치약을 힘주어 짜냈을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

나의 버릇을 병이라기보다는

몸가짐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 겨울의 밤과 잠과

아직 이룬 순(筍)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박준, <잠의 살은 차갑다> -



마늘을 한 접 더 사 오는 것으로 남은 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 들여야 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반쯤 낡았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습니다 어제는 '들'이라 적어야 할 것을 '틀'로 잘못 적었지만 고치지 않았습니다 달라질 것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내일은 바람이 잦아든다고 하니 구경을 겸해 뒷산을 오를 것입니다 며칠 전 내린 큰 눈이 아직 나무들 위에 쌓여 있을 테고 그러다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날리는 백매(白梅)를 함께 보았던 사월도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 박준, <오늘> -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 박준, <세상 끝 등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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