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서
최영미의 시는 벌거벗은 검투사의 창처럼 위험하다. 계산이나 사교나 속도에 길들지 않은 호흡으로 위선이 숨을 곳을 차단한다. 예측 불허의 표현과 자유로운 사고의 좌충우돌 속에 온몸을 던져 쓴 새 시집을 펼친다. 자신을 치열하게 드러낸 시와 외로운 삶의 우박들이 시린 상처처럼 솟구친다.
배고프지 않아도 짐승을 죽이고
발정기가 아닌데도 욕망을 일으키고
꽃, 나무, 하늘, 땅……
서로 다른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같은 여자는 없는데
'여자'라 부르며
추상화시키는 능력
내 것
내 여자
내 음식
내 땅
소유의 시작
착취의 시작
전쟁의 시작
- 최영미, <문명의 시작> -
위로받고 싶을 때만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하는 척했다
- 최영미, <예정에 없던 음주> -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코트 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 최영미, <괴물> -
대한민국 법원에서 보낸 소장을 받고
나는 피고 5가 되었다
두터운 종이에 쪽수도 매겨 있지 않았다
이걸 내가 왜 읽어야 하지?
한 편의 짧은 시를 쓰고
100쪽의 글을 읽어야 하다니
아름답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문장들
쉼표도 찍히지 않은,
골치 아픈
적대감으로 가득하나 마지막은 '합니다'
정중하게 끝을 맺은
독이 묻은 종이를 읽고 싶지 않아
내가 아끼는 원목가구를 더럽힌다는 게 분했지만,
서랍장 위에 원고와 피고 5를 내려놓고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 최영미, <독이 묻은 종이> -
찬바람 속에 봄을 숨겨놓은
3월이 제일 춥다
겨울이 끝나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
봄이 오기도 전에
두터운 외투를 치우고
당신은 숨겨놓은 방은 춥지 않았지
- 최영미, <꽃샘추위> -
용문에서 목격한 어느 죽음.
앞산 뒤뜰이 떠들썩하게 소리와 색으로 물들어
꽃 같은 죽음.
생일잔치 같은 장례식.
이 세상에 나올 때,
그리고 들어갈 때만 화려한 사람들.
- 최영미, <시골 장례식> -
내 앞에 앉은 일곱 사람 중에
청바지를 발견할 수 없다면
청바지를 앉히지 않은 의자가 있다면,
내 앞에 앉은 일곱 남녀 가운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이 스마트한 문명을 용서해줄 수 있다
- 최영미, <지하철 유감> -
"인생은 낙원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다.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슬픔도 고독도 핑크빛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가장 먼 미래는 서른 살이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 최영미, <낙원> -
양심과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자들이
이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지
단순한 흑백보다는 복잡한 회색이 인류에게 덜 해롭다
- 최영미, <짧은 생각> -
시 2편 달라는 메일을 받고
세수도 하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고
계량기 교체하느라 단수한다는 안내방송도 듣지 못하고
시간의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겨
이미 여러 번 우려먹은 기억을 재활용하느라
새벽부터 엉덩이 붙이고 앉아
브런치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10분 전인데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어떤 사랑의 묘약이 이보다 독하랴
- 최영미, <원고 청탁> -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 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 최영미, <밥을 지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