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백석 지음 / 고형진 엮음 <정본 백석 시집>에서

by 꿈강

백석은 오랫동안 현대시사의 광상 속에 매몰되어 있다 뒤늦게 발굴된 보석 같은 시인이다. 현대시사의 광맥을 새롭게 탐색해 들어가던 1980년대 초반에 비로소 온전히 채굴되기 시작한 그의 시는 지상의 진열대 위에 놓이면서 찬란한 빛깔과 광택을 지닌 보석으로 광채를 뿜기 시작했다. 백석 시의 발굴로 우리 시사는 한층 새롭고 풍요로운 진영을 갖추게 되었다. 소월과 만해와 지용 세 인물에 의해 초석을 다진 것으로 알려졌던 우리 현대시의 역사는 백석의 출현으로 새로운 시야와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35년부터 194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집중적으로 시를 발표했던 백석은 소월과 만해와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워 나감으로써 우리 시의 미학과 영역을 크게 넓혀나갔다. 백석은 종래의 우리 시가 미처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감으로써 우리 시의 용적을 크게 확장시켰다. 지용이 우리 시에 최초로 현대시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시인이라면, 백석은 그 생명체에 다양한 조직과 기관을 이식시켜 활발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성한 생명체는 뛰어난 번식력을 갖는 법이어서, 그의 시는 후대의 시인들에게 깊숙이 번져 나갔다. 백석의 시는 당대는 물론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젊은 시인들에까지도 닿아 있다.


책을 엮은 고형진 교수의 평이다. 대단한 시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소월, 만해, 지용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시인이고 오늘의 젊은 시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시인이란다. 백석의 시를 읽으면 옛이야기 한 편을 듣는 듯하다. 정겨운 풍경 하나가 포르릉 떠오른다. 뜻을 알기 어려운 낯선 낱말들은 모르는 채 그대로 넘어가도 시를 감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자, 이제 백석의 시를 만나 보자. 가만가만 읽어 보면 뭔가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으리라.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조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 리 라고 해서 파랗게 뵈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난골족(族)>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이녀(李女): '이녀(李女)' '홍녀(洪女) '홍(洪)동이' 등은 평북 지방에서 아이들을 지칭할 때 쓰는 애칭. 아버지가 '홍가(洪家)'일 경우 아들아이는 '홍(洪)동이', 딸아이는 '홍(洪)녀'라고 부른다. *숨굴막질: 숨바꼭질. *화디: '등잔걸이'의 평북 방언. *사기방등: 사기로 만든 등잔. *홍게닭: 토종닭. *텅납새: '추녀'의 평안 방언. *무이징게국: 새우에 무를 썰어넣어 끓인 국.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늬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 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일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늬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모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아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워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우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워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모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메추라기를 잡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모면 이 밤엔 새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녀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백석, <고야(古夜)> -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하는 사람. *날기멍석: 낟알을 말릴 때 쓰는 멍석. *니차떡: '찰떡' '인절미'의 평북 방언. *청밀: 꿀. *조마구: 조막. '조무래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재밤: '재밤중'의 준말. '한밤중'의 평안 방언. *삿귀: 갈대를 엮어서 만든 가장자리. *쇠든밤: 새들새들해진 밤. 말라서 생기가 없어진 밤. *은행여름: 은행나무 열매. *광대넘이를 뒤이고: 물구나무 섰다 뒤집으며 노는 모습을 말한다. *평풍: '병풍'의 평안 방언. *천두: 천도복숭아. *쩨듯하니: 환하게. *냅일날: 납일(臘日). 동지 뒤의 셋째 미일(未日). 대개 음력으로 연말 무렵이 되는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냅일눈: 납일에 내리는 눈. 이 눈을 받아 녹인 납설수(臘雪水)는 약용으로 썼다. 납설수로 눈을 씻으면 안질에도 걸리지 않으며 눈이 밝아진다고 믿었고, 납설수로 장을 담그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하여 장을 담글 때도 사용했다. *곱새담: 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은 담. '곱새'는 '용마름'의 평북 방언. *버치: 자배기보다 조금 깊고 아가리가 벌어진 큰 그릇. *대냥푼: 큰 양푼. *눈세기물: '눈석임물'의 평안 방언. 눈이 녹아서 된 물. *진상항아리: 가장 소중한 항아리. *갑피기: '이질'의 평북 방언.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

*새끼오리: 새끼줄. *갓신창: 가죽신 바닥에 댄 창. *개니빠디: 개의 이빨. *너울쪽: 널빤지. *짚검불: 지푸라기. *닭의 짗: 닭의 깃털. *재당: 향촌의 최고 어른에 대한 존칭. *초시: 과거의 첫 시험에 급제한 사람. 또는 한문을 좀 아는 유식한 양반을 높여 부르는 말. *문장: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갓사둔: 새사돈. *불상하니도: '불쌍하니도'의 고어. *몽둥발이: 몽동발이.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러 가는 아배의 지게에 치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 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아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백석, <오리 망아지 토끼> -

*오리치: 동그란 갈고리 모양으로 오리를 잡는 도구. *동비탈: 동쪽의 비탈. *동말랭이: 동쪽의 등성이. *시악: 악한 성미로 부리는 악. *엄지: 짐승의 어미. *매지: 망아지. *새하러: 나무하러. *맞구멍: 마주 뚫린 구멍.



신 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 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人家) 먼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 백석, <적경(寂境)> -

*산국: 산후에 산모가 먹는 국. 적경(寂境): 고요하고 평온한 지경 또는 장소.



산 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 백석, <산(山) 비> -

*닌다: 일어난다. *자벌기: 자벌레. *켠: 쪽. 방향.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면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 -

*가지취: 참취나물. *금점판: 주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 -광의 일터. *섶벌: 나무섶에 집을 틀로 항상 나가서 다니는 벌. *머리오리: 머리카락.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은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백석, <수라(修羅)> -

*어니젠가: 언젠가. 어느 사이엔가. *싹다: 삭다.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다. *가제: 갓. 방금.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두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백석, <삼천포(三千浦)> -

*재릿재릿하니: 간지러운 느낌을 나타내는 말. *기르매: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히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백석, <선우사(膳友辭)> -

*나조반: 음식을 놓는 상. *소리개: 솔개. *세괃은: 성질이나 기세가 억센. *선우(膳友): 반찬 친구.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출출이: 뱁새. *마가리: 오막살이. *고조곤히: 고요히.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않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백석, <고향> -

*관공: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관우'를 칭하는 말.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백석, <멧새소리> -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한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백석, <팔원(八院)> -

*진진초록: 매우 진한 초록. * 자성: 평안북도 북단에 있는 지명. *주재소: 일제강점기에 순사가 머무르면서 사무를 맡아보던 경찰의 말단 기관. *내임: 배웅. *아이보개: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 *팔원: 평안북도 영변군 팔원면.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덕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옥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은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 -

*산엣새: 산에 있는 새. *나려 멕이고: 계속해서 내려오고. *김치가재미: 겨울철에 김치를 묻은 다음에 얼지 않게 그 위에 지푸라기나 수수깡 따위로 만들어놓은 움막. *은댕이: 마을 이름으로 추정됨. *예데가리밭: 대여섯 낮 동안 갈 정도 넓이의 밭. *산멍에: 산무에뱀의 고어. *분틀: 국수틀. *우물둔덕: 우물 둘레의 작은 둑 모양으로 된 곳. *큰마니: 할머니. *짚색등이: 짚과 등나구 줄기로 짜서 만든 자리. *자채기: 재채기. *큰아바지: 할아버지. *댕추가로: 고춧가루. *탄수: 식초. *아르궅: 아랫목.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잇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주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

*때글은: 때가 묻어 검게 된. *생각하는 내: 생각하는 동안. *앞대: 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이즈음에 이르러.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눈질: 눈으로 흘끔 보는 것. *귀해하고: 귀하게 여기고. *바구지꽃: 박꽃. *짝새: 뱁새.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삿: 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 *쥔을 붙이었다: 주인집에 세 들었다. *딜옹배기: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벌어진 작은 질그릇. *북덕불: 짚이나 풀 따위가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에 피운 불. *굴기도 하면서: 구르기도 하면서. *나줏손: 저녁 무렵. *바우섶: 바위 옆. *정한: 깨끗하고 바른. *갈매나무: 갈매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유동'은 신의주 남쪽 지역에 있는 동네 이름. '박시봉'은 시의 문맥에서 화자가 세 들어 산 집주인의 이름이며, '방'은 편지에서 세대주나 집주인의 이름 아래 붙여 그 집에 기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 시의 제목이 마치 편지봉투의 발신인 주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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