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 사는 / 살아갈 이야기
전동 스쿠터를 타며 매일 법을 어깁니다
퇴직 후, 30년 넘게 살아온 도시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손녀딸을 돌보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도 퇴직한 터라 자동차 두 대가 꼭 필요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과감하게 한 대를 정리했다.
어, 그런데 막상 차 한 대를 처분하고 나니, 좀 불편할 때가 종종 생겼다. 아내가 차를 사용하고 있을 때 내가 이동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했고 그 반대 상황이 벌어지는 적도 있었다. 경차라도 하나 구입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 도시가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데 얼마나 불편한가를 떠올리고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도시 안에서 움직일 때 이동 수단이 하나 더 꼭 필요했다. 지방 도시는 서울과 달리 대중교통망이 그리 촘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전동 스쿠터를 한 대 장만했다. 자전거 도로가 아주 잘 갖추어져 있는 이 도시를 이동하는 데에 안성맞춤인 탈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동 스쿠터를 구입하면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구입한 전동 스쿠터는 자전거 도로로 다닐 수 없다고 했다. 최고 속도 시속 25km 이하, 무게 30kg 이하의 전기 자전거는 자전거 도로로 통행할 수 있는데, 내 스쿠터의 경우 무게가 35kg이었다. 또 내가 구입한 것은 전기 자전거가 아니라 전동 스쿠터인지라 당연히 자전거 도로로 통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디로 다녀야 하냐고 판매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차도 맨 우측으로 붙어서 다녀야 한단다. 내가 구입한 것과 비슷해 보이는 전동 스쿠터들이 죄다 자전거 도로로 다니는 걸 보았다고 했더니, 법적으로는 차도로 다니게 되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자전거 도로로 다니는 것이란다.
스쿠터 판매하는 사람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만약 그 사람의 말이 맞다면, 차도로 다니는 전동 스쿠터들을 어찌 그리도 볼 수 없단 말인가. 이 도시의 시민들은 정녕 그토록 준법정신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러다가 한 주민센터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보고 나서 스쿠터 판매하는 사람의 말이 완벽한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자전거 도로로 통행할 수 있는 이동 장치에 대한 안내가 그림과 함께 붙어 있었는데, 내가 타고 다니는 전동 스쿠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좀 희한하다고 생각한 사실은, 내가 볼 일이 있어 방문했던 몇몇 주민센터에는 그런 안내문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유독 그 주민센터에만 그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유독 그 주민센터에만 그런 안내문이 붙어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전동 스쿠터 운전자들은 하나같이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교통 관련 규칙이나 법령을 지키는 데 진심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좌회전할 때에는 도로에 그어진 유도선을 준수하며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규정 속도에 맞춰 운전하려고 애쓴다. 운전 경력이 30년을 훌쩍 넘었는데 그동안 과속 딱지를 받은 총횟수가 열 번을 넘지 않는다. 또 내비게이션 어플에서 제공하는, 월별 운전 점수는 일 년에 최소 열 달은 100점을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 달은 99점.
규칙이나 법령을 준수하며 운전해 오던 그동안의 나의 습관에 따른다면, 당연히 차도 맨 우측에 붙어 전동 스쿠터를 몰아야 한다. 그런데 '최고 시속 25km로 차도를 누비고 다니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교통 흐름을 방해할 것은 뻔할 뻔 자이고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클랙슨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야 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의 안전을 온전히 담보할 수 없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요즘 부주의한 자동차 운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운전 중에 한눈을 팔다가, 자동차로 내 전동 스쿠터를 슬쩍 스치기도 하는 날엔 내가 전치 4주 이상의 부상을 입을 확률은 100%에 수렴할 터이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도시의 많은 다른 전동 스쿠터 운전자처럼, 나도 자전거 도로로 전동 스쿠터를 몰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법을 어기며 자전거 도로로 전동 스쿠터를 몰고 다닌 지 4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차도로 다니는 전동 스쿠터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단 한 대도 없다.
또 자전거 도로로 다니는 전동 스쿠터를 단속하는 일도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길을 걷다가, 경찰관이 자전거 도로로 통행하고 있는 전동 스쿠터를 멈춰 세우는 걸 보았다. 자전거 도로 통행을 문제 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운전자가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러 세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동 스쿠터가 자전거 도로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법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지키라고 강제하지도 않는 법은 도대체 왜 있는 것일까?
물론 입법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보행자나 일반 자전거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리라 짐작한다. 그렇다고 최고 시속이 시속 25km에 불과한 전동 스쿠터를 차도로 운행하라고 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너무 무섭다. 부주의한 차량 운전자가 조금만 실수해도 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법을 어기며 전동 스쿠터를 몰고 자전거 도로로 들어선다. 늘 그렇듯 마음이 편치 않다. 60 평생을 살아오면서 정해진 규칙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전동 스쿠터를 몰면서부터 밥 먹듯이 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법을 지킨답시고 차도로 내려설 수도 없다. 전동 스쿠터를 몰고 차도로 나섰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을 어기더라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언제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전동 스쿠터 운전을 끝내는 순간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 대해 관심을 두는 주체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자니 내 안전이 염려되고, 법을 무시하자니 뭔가 찝찝하다. 안전도 지키고 찝찝함도 떨쳐낼 수 있는 묘수는 정녕 없을까? 전동 스쿠터를 타지 않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대중교통 체계가 그리 촘촘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그 또한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내일도 나는 전동 스쿠터를 몰고 자전거 도로로 들어설 것이다.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비난의 눈초리를 날리는 사람도 없겠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을 터이다. 다른 법은 잘 지키는 내가, 아니 최소한 법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내가, 천연덕스럽게 법을 어기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