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딸네 집 주방 정리를 하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할머니'라고 부르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손녀딸이 깬 것이다. 아내와 내가 거의 동시에 손녀딸에게로 달려갔다. 손녀딸은 물개 애착 인형 '보노'를 껴안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아내한테 등을 긁어 달라고 한다. 아내가 긁어 주다가 나와 교대한다. 아내는 손녀딸 아침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10분 동안 그러다가 손녀딸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아침밥 먹이고 옷 입혀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거실로 나와, 내가 애니메이션(페파 피그)을 트는 동안, 아내가 손녀딸 아침상을 차린다. 메뉴는 어제와 비슷하다. 다만 치킨이 빠지고 콩나물 무침과 멸치 볶음이 올라왔다. 따끈한 물 한 잔도 물론 있다. 뭇국에 만 밥과 호박죽을 번갈아 먹여주는데, 잘 받아먹는다. 크려나 보다.
등원복은 원피스다. 바지와 원피스 중, 무얼 입겠냐고 아내가 물으니 원피스라고 대댭했다. 어린이집에서 체육 활동이 있거나 특별한 야외 행사가 있는 날을 빼곤, 손녀딸은 무조건 원피스를 입는다. 커서 공주님이 되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아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공주들이 죄다 원피스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오늘도 아내가 골라온 원피스를 단박에 오케이 했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왕관에, 팔찌에, 반지에, 목걸이에 무슨 봉까지 들고 가겠단다. 완벽한 공주 복장이다.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는 목걸이만 빼고 다 차에 놓고 가라고 했더니, 순순히 그러겠다고 한다. 제법 말이 통한다.
어린이집에 가는 차 안에서 손녀딸과 아내가 역할 놀이를 자주 한다. 오늘은 손녀딸이 엄마, 아내가 아기 역이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내가 아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느라 애를 쓴다. 아내의 대사가 막힐 때마다 손녀딸이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지를 알려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손녀딸이 일찍 일어나고 등원 준비 과정도 순조로워, 등원 역사상 가장 이른 시간에 도착한 듯하다. 8시 50분이다. 주차장이 휑해 보일 정도로 주차 공간에 여유가 있다. 어린이집 현관 앞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었다. 어떤 선생님이 손녀딸에게 알은체를 하며 손녀딸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걸 보려고, 안을 들여다보니 손녀딸은 어느 틈엔가 선생님이 아니라 어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친구들의 손을 참 잘 잡아주는, 마음이 따뜻한 우리 손녀딸이다. 그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손녀딸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손녀딸은 등원했다. 8시 56분이다. 역사상 가장 이른 등원이다.
손녀딸 하원을 위해 집으로 오니, 3시다. 수요일은 아내가 그림 그리러 가는 날이라 스쿠터로 손녀딸을 하원시키기로 했다. 스쿠터를 가지고 손녀딸 하원시키러 가는 날은 마음이 무척 편안하다. 주차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손녀딸 먹을 간식과 손녀딸이 가져오라고 한 따끈한 물을 챙겨, 스쿠터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4시 5분 전쯤 손녀딸이 1층 로비로 나오더니, 유리문 밖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곧장 밖으로 나온다. 나오자마자 어린이집 가방을 벗는다. 그런데 가슴 쪽으로 채워진 끈을 풀지도 않고 용케도 가방을 벗었다. 유연해서인지 그리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실외화로 갈아 신으라고 신발장을 열어 주었더니 자기 신발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의 신발도 꺼낸다. 예전에 손녀딸이 신고 다녔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이다. 때마침 그 신발 주인인 아이도 나왔다. 손녀딸이 자연스럽게 친구에게 신발을 건네주었다. 설마 그 친구가 나오는 걸 알고 그런 건 아니겠지?
스쿠터에 태우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빨리 달리라고 성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거린다. 그 종알거림은 나에게 음악이다. 기분을 아주 좋게 해 주는. 스쿠터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어린이집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토끼 인형을 떼어 달란다. 이름은 '마빼치'란다. 자기가 꼭 안고 가겠단다. 그러다가 놓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자기가 꼭 안고 갈 테니 그런 걱정은 말란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인형을 떼어 줄 수밖에 없었다. 스쿠터를 좀 더 조심조심 운전할밖에. 다행히 무사히 딸네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올라가자마자,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해서 읽어 주고 있는데 딸이 퇴근해서 왔다. 손녀딸이 '수학 놀이터'라는 곳에 가는 날이라, 딸은 수요일엔 조퇴를 하고 일찍 집에 온다. 손녀딸은, 웬일인지 제 엄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가 읽어 주는 동화책에 푹 빠져 있다. 희한한 일이다. 보통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딸에게 토끼 인형의 이름이 '마빼치'냐고 물었더니, 딸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손녀딸이 즉흥적으로 지은 이름인 듯하다.
손녀딸이 내가 준비해 온, 텀블러에 들어 있는 따끈한 물을 마시다가 입 안 가득한 물을 내뿜었다. 거실에 깔아 논 매트가 흥건히 젖었다. 손녀딸이 "미안해요. 물이 입 안에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실수예요."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손녀딸을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수학 놀이터'에 가야 할 시간이 되어, 손녀딸을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딸과 함께 딸네 집을 나섰다. 손녀딸이 타는 세발자전거는 뒤에서 사람이 밀어줄 수 있는 장치가 달려 있는 자전거이다. 오늘은 내가 자전거를 밀어주기로 했다. '수학 놀이터'까지는 약 10분 남짓 걸린다. '티니핑' 주제가를 들으며 기분 좋게 '수학 놀이터'에 도착했다. 손녀딸이 제 엄마에게 "힘들었어?"라고 묻는다. 딸이,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밀어주어서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손녀딸이 나를 쳐다보며, "할아버지, 힘들었어?"라고 똑같이 묻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손녀딸 볼에 입을 맞추었다.
손녀딸과 딸은 '수학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온 길을 되짚어 딸네 집으로 향한다. 거기에 내 스쿠터를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퇴근길이다.
8시 30분쯤 딸내미가 메시지를 보냈다. 토끼 인형 이름 '마빼치'의 비밀이 밝혀졌단다. 그 토끼 인형의 이름은 '마빼치'가 아니고 '롸비츠(rabbits)'라는 것이었다. 손녀딸의 원어민 발음을 할아버지가 미처 알아듣지 못해 생긴 해프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