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손녀딸을 보지 못했다. 별일 없으면 금요일에 딸네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는데, 지난 금요일 우리 부부에게 별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이를 '냉담'이라고 부른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구역 미사가 있으니 꼭 참석하라는 연락이 와서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던 터였다.
하여 사흘 동안이나 손녀딸을 못 보고, 오늘에야 손녀딸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를 꽤 오랜만에 보게 되는 것이라, 손녀딸이 우리를 퍽 반기리라는 기대 때문인지 딸네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한결 가볍다.
평소와 같이 6시 25분쯤 딸네 집에 도착했다. 손녀딸 방을 들여다보니, 웬일인지 손녀딸은 이불을 덮고 꿈나라 여행 중이다. 아무리 이불을 덮어주어도 그렇게 차 내버리더니만 어제부터 부쩍 차가워진 공기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 덮게 만들었나 보다. 나흘 만에 손녀딸 얼굴을 보니, 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입가를 떠날 줄 모른다. 아마 이 세상 모든 할아버지들이 그러하리라.
오늘은 딸이 먼저 출근한다. 사위는 아직 씻는 중이다. 10분 후 사위도 출근했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인지 졸음이 밀려온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아내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싱크대 주변과 식탁 주변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만한 일들은 딸네 부부가 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될 텐데 아내는 그러질 못한다. 이쯤이면 아내가 그렇게 하는 건 DNA의 명령 때문이라고 해야 마땅할 듯싶다.
잠결에 손녀딸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내가 손녀딸한테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7시 30분이다. 손녀딸이 아내에게 아내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해 달라고 한다. 아내의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종종 해 달라고 한다. 나한테는 이야기해 달라는 소리를 잘 안 하는데 아주 가끔 기습적으로 한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깃거리를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늘 고민이다. 손녀딸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려면 좀 더 힘을 내야 할 성싶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손녀딸에게로 갔다. 아내는 손녀딸의 아침밥을 준비해야 해서 내가 손녀딸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추워하는 듯해서 아내가 건네준 자그마한 이불로 폭 감싸 안았다. 한동안 그렇게 내 품에 안겨 있더니, "할아버지, 심심해요."라고 하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텔레비전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우리말로 된 '티니핑'과 '시크릿 쥬쥬'라는 애니메이션을 조금 보다가 재미없다고 한다. 아내가 영어로 된 걸 보자고 했더니 자기는 영어로 나오는 게 싫단다. 조금 있다가 슬그머니 '페파 피그(Peppa Pig)'라는 영어로 된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싫다고 한 것과는 달리 별 말 없이, 재미있게 잘 본다.
그러면서 아내가 준비해 준 아침밥을 먹인다. 한 입 크기로 썬 사과, 소고기 뭇국에 만 밥, 콩나물 무침, 멸치 볶음, 그리고 따끈한 물이 우리 손녀딸의 오늘 아침 식사 메뉴이다. 사과는 손녀딸이 포크로 찍어서 잘 먹기에 나는 소고기 뭇국에 만 밥을 떠 먹인다. 밥을 한 숟가락 떠서 그 위에 콩나물과 멸치를 얹어서 먹인다. 이때 뭇국에 만 밥을 충분히 식혀야 한다. 뜨거우면 잘 안 먹기 때문이다. 차가운 밥을 잘 먹는다. 그런데 물은 따끈해야 한다. 물이 조금 식으면 "안 따끈해."라며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손녀딸의 입맛은 참 섬세하다. 그 또한 마냥 귀엽고 예쁘기만 하다.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배가 고팠는지 밥을 거의 다 먹었다. 사과도 깨끗하게 다 먹었다. 따끈한 물도 절반 넘게 마셨다. 밥을 먹으면서 어린이집에 입고 갈 옷을 골랐는데, 오늘은 아내가 골라온 원피스를 한 번에 오케이 했다. 딱 마음에 들었나 보다. 옷을 입을 때도 아내에게 아주 협조를 잘했다. 팔을 꿸 때, 사과 찍은 포크를 이쪽저쪽 손으로 옮겨 가며 아내가 옷을 입히기 쉽도록 팔을 옷소매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많이 컸다. 옷 입을 때 협조할 줄도 알고…….
양치질도 하고 로션도 발랐다. 이제 어린이집으로 출발할 준비를 다 마쳤다. 어린이집에 가자고 했더니 '보노'를 데리고 가겠단다. 손녀딸의 물개 애착 인형이다. 크기가 제법 커서 손녀딸이 안고 가다가 떨어뜨리면 보노가 지저분해지는 게 문제지만, 조심조심 꼭 안고 가기로 했다. 물론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는 가지고 가지 않는다, 언제나 차에서 보노와 작별한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탔다. 아, 그런데 손녀딸이 잘 신는 공주 실내화를 딸네 집 현관이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차 안에는 무지개 실내화와 오리 실내화뿐이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어떤 실내화를 신을 거냐고 물으니, 공주 실내화를 신겠다고 한다. 딸네 집 현관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어린이집 신발장에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딸네 집에 들어갈 때 현관에서 공주 실내화를 본 기억이 뚜렷해서, 실내화를 가지러 딸네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내가 공주 실내화라고 생각했던 신발은, 빨간색의 실외화였다. 심지어 공주 실내화와는 재질도 완전히 달랐다. 노안을 탓할밖에…….
하릴없이 다시 차로 내려와 어린이집을 향해 출발했다. 어린이집으로 가면서, 아내가 손녀딸에게 엄마, 아빠한테 인사하라고 했더니, "엄마, 아빠 좋은 하루 안 보내세요."라고 한다. 뒤집어 말하는 게 재미있나 보다. 가끔씩 이렇게 뒤집어 말하곤 한다.
9시 16분경,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렀다. 다행히 주차할 공간이 여러 곳 보인다. 천만다행이다. 아내가 손녀딸 손을 잡고, 나는 낮잠 이불과 가방을 챙겨 들고 어린이집 현관문으로 향했다. 신발장 앞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기고 가방을 메어주는데, 원감 선생님이 나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안경을 쓰고 있다. 예리한 눈매의 소유자인 우리 손녀딸이 그걸 놓칠 리 없다. "선생님, 오늘 왜 안경 쓰고 왔어요?"라고 묻는다. 원감 선생님은 그럴 일이 있다며 "선생님, 예뻐?"라고 손녀딸에게 되묻는다. "네, 예뻐요." 손녀딸의 지체 없는 대답이다. 역시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우리 손녀딸이다. 손녀딸이 어린이집 1층 로비로 들어서니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다. 손녀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내가 딸네 부부에게 '등원 완료' 메시지를 보냈다. 손녀딸 어린이집 등원이 마무리되었다. 아내와 나는 이제 각자의 시간을 가지다가, 손녀딸을 하원시키기 위해 다시 뭉칠 것이다.
손녀딸 하원을 위해 도서관을 나섰다. 전동 스쿠터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3시쯤 되었다. 손녀딸 하원 시간은 4시다. 보통은 아내와 함께 자동차로 손녀딸을 하원시킨다. 오늘은 해야 할 집안일이 있어서 나 혼자 스쿠터로 손녀딸을 하원시키기로 했다. 아내는 집안일을 마저 해 놓고 차를 타고 딸네 집으로 오기로 했다.
약간 걱정되는 점이 있었다. 손녀딸이 스쿠터 타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오늘 스쿠터로 하원한다는 사실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손녀딸은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지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말도 없이 스쿠터를 가지고 가기에, 스쿠터에 타지 않겠다고 떼를 쓸까 염려되는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3시 53분이었다. 잠시 후 4시에 하원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손녀딸이 앞장을 섰다. 현관문 밖에서 손녀딸을 맞이하며 스쿠터를 가져왔다고 했더니 좋아하는 눈치다. 퍽 다행이다.
스쿠터에 태우고 딸네 집으로 향했다. 더 빨리 달리라고 난리다. 다행히 '제천'이라는 냇가를 따라 딸네 집까지 자전거 도로가 잘 닦여 있다. 딸네 아파트에 진입하는 지점에서 딱 한 번만 횡단보도를 건너면 된다. 그러니 손녀딸을 스쿠터에 태워도 퍽 안심이 된다. 자전거 도로가 잘 닦인 이 도시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4시 10분쯤에 딸네 집에 들어섰다. 손녀딸에게 손을 씻으라고 했다. 혼자서도 곧잘 씻는다. 물론 비누를 꼼꼼하게 칠하는지는 잘 살펴보아야 하지만. 손을 씻고 나온 손녀딸에게 준비해 간 과자와 물을 주었다. 과자를 몇 개 집어 먹은 후 물을 마시려다 말고 "얼음물이야?"하고 묻는다.
아, 얼음물이 아니다. 손녀딸이 아침에는 따끈한 물, 하원할 때는 차가운 물을 마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날씨가 서늘한 관계로 일부러 얼음물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손녀딸 얼굴이 울상으로 변하려 하는 걸 보고, 부랴부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물통에 넣어 주었더니 그제서야 흡족한 얼굴로 물을 맛있게 마신다. 아,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손녀딸을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 한 권을 읽어 준 다음 손녀딸과 놀고 있는데 아내가 왔다. 손녀딸이 아내에게 쪼르르 가더니,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 달란다. 아침에도 그랬는데 저녁에도 또 그런다.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다 들은 손녀딸이 다시 내게 왔길래, 왜 할아버지한테는 어린 시절 얘기를 해 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할아버지는 이야기꾼이고 할머니는 책 읽기꾼이란다. 또 뒤집어 말하기 신공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 '꾼'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동화책에서 들었을까? 아니면 딸내미가 이야기해 주었을까? 아무튼 우리나라 나이로 네 살밖에 안 된 손녀딸의 언어 구사력이 좀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