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가 지난 목요일부터 여행을 떠났던 터라, 손녀딸을 닷새만에 보게 되는 날이다. 우리 부부가 손녀딸 어린이집 등원을 도맡은 이래, 이렇게 오랫동안 손녀딸을 보지 못한 경우는 처음인 듯싶다.
딸네 집에 들어가자마자 손녀딸 방을 들여다보았다. 침대가 휑하다. 손녀딸은 벌써 깬 것이다. 딸내미 말을 들어보니 다섯 시에 깼다고 한다. 안방 제 엄마 옆에 앉아 있는 손녀딸을, 아내가 안고 거실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책을 읽어 달란다. 아내가 책을 읽어 주니, 책의 구절을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듣는다.
손녀딸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텔레비전을 보여 달란다. '캐치 티니핑'을 보겠단다. 우리말 버전이라 다른 걸 보자고 했더니, 한사코 그걸 보겠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캐치 티니핑'을 틀어 주었다.
그 사이 아내가 손녀딸 아침밥을 차렸다. 호박죽과 오트밀 죽을 번갈아 입에 넣어 주니, 오물거리며 잘 먹는다. 갑자기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청소를 시작한 것이다. 얼른 가서 청소기를 받아 들었다. 아내는 손녀딸 머리도 땋아 주고, 양치도 시켜야 하는 등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공용 욕실 근처를 청소기로 밀고 있는데, 손녀딸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할아버지, 시끄러워요."라고 한다. 텔레비전 소리가 잘 안 들렸나 보다. 그래도 청소기는 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속도를 높여 속전속결로 청소를 마무리했다.
어린이집에서 초록색 계통의 옷을 입혀 보내 달라고 해서, 딸내미가 준비해 놓은 옷을 입혔다. 손녀딸이 이런 색깔의 옷을 입기는 처음인 듯하다. 입때껏 주로 핑크색, 노란색, 보라색 계통의 옷을 입었었다. 내가 보기에 손녀딸에게 초록색 계통의 옷도 아주 잘 어울린다. 하긴, 무슨 색인들 어울리지 않으랴.
내가 손녀딸에게 초록색 옷도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가 아기 때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좋아한단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했던 검은색도 이제는 좋다고 한다. 43개월을 향해 치닫고 있는 손녀딸, 크기는 컸나 보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8시 50분쯤 되었다. 주차장이 한적하다. 항상 이 시간에 올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게 내 맘대로 안 된다. 어디까지나 손녀딸에게 달린 문제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린이집 가방을 메어 주었더니, 쫄랑쫄랑 어린이집 현관으로 달려간다. 발걸음이 가볍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인다. 나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으며, "이거, 맞아?"라고 묻는다.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 신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신더니만, 요즈음은 신발을 제대로 신고 있는지 꼭 묻곤 한다. 한 뼘 더 자란 우리 손녀딸이다. 오늘도 제대로 신었다. 손녀딸은 아내를 한번 안아 준 다음, 선생님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3시 35분에 아내와 함께 집에서 나와 차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손녀딸이 4시에 하원하지만 4시 가까이에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주차하기가 어려워 좀 일찍 나섰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3시 45분이다. 주차할 공간이 서너 군데 보인다. 예상대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손녀딸이 나왔다. 오늘은 담임 선생님도 같이 나왔다. 담임 선생님이 아내와 나를 보더니, 손녀딸이 오늘은 '○율이'와 재미있게 놀았다고 전해 준다. 평소에는 같이 잘 놀지 않던 친구다.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같은 반 모든 아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으면…….
손녀딸이 차 안에서 간식을 맛있게 먹는다. 준비해 간 딸기 웨하스다. 운전하느라 막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먹는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알 것 같았다.
딸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내내 손녀딸은 뒷걸음질을 쳤다. 재미있나 보다. 내가 짐을 들었기에 아내가 손녀딸 손을 잡아 주었다. 아내와 나는 혹시라도 손녀딸이 넘어질까 봐 조바심이 나지만 손녀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냥 즐겁다. 조금 걱정이 되지만 손녀딸이 저렇게 즐거워하니 나 또한 즐겁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직행해 손을 씻고 나온 손녀딸은, 애착 인형 보노를 끌어안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보노, 보노, 보노, 보노, 보~~~노'라고 외치면서 깔깔 웃는다. 저렇게도 보노가 좋을까 싶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넌 할머니보다 보노가 좋지?'라고 묻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이번엔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다. 재미있는 새로운 놀이를 발견했다는 듯 깔깔대면서 말이다. 이런 장난은 어디서 배운 건지 몹시 궁금하다. 누워서 바동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깔깔거린다. 세월 참 빠르다.
그러는 사이 딸내미가 퇴근했다. 딸내미가 씻는 동안 손녀딸 저녁을 먹였다. 딸내미가 씻고 나왔다. 이제 아내와 내가 집으로 갈 시간이다. 손녀딸 저녁 먹이느라 오늘은 좀 늦었다. 딸내미와 손녀딸의 배웅을 받으며 딸네 집을 나선다. 손녀딸이 딸내미 앞에, 마치 새끼 캥거루가 어미 캥거루 주머니에 들어간 것처럼 포개어 선다. 둘이 함께 배꼽 인사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절로 난다. 오늘 하루도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