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녀딸 방을 들여다보았다. 손녀딸이 침대 위에서 팔을 휘휘 내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 깰 것 같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딸내미한테 물어보니 어제저녁 7시에 잠이 들었다고 한다. 평소보다 일찍 꿈나라로 간 것이다. 지금은 6시 30분이다. 곧 깰 것 같다.
손녀딸이 뭐라고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7시다. 아내와 내가 쫓아가 보니 손녀딸은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다. 잠은 깼는데 일어나기는 싫은 모양이다. 아내가 "할머니가 옆에 누울까?"하고 물었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한다. 이보다 더 조신한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을 터이다. 아내는 손녀딸 옆으로 가 눕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5~6분이 채 지나지 않아 손녀딸 방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내가 거실로 나온다. 손녀딸이 책을 읽어 달라고 했다며 돋보기안경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책 읽어 주는 소리가 들린다. 책 한 권을 다 읽자마자 손녀딸과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손녀딸은 애착 인형 '보노'를 안고, 아내는 손녀딸을 안은 채.
아내가 손녀딸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 품에 안긴 손녀딸은 할아버지를 본체만체하며 '보노' 꼬리에 제 입술을 연방 문지른다. 그러더니 연신 "보노, 보노, 보노~~~~" 하며 무슨 마법의 주문을 외듯이 종알거린다. 가끔은 리듬감도 살려 가면서 계속하더니 이번엔 "본노, 본노, 본노~~~~" 라고 변주하기도 한다 족히 3~4분을 그러고 있었던 듯하다. 아침부터 손녀딸의 '보노 변주곡'을 한바탕 감상했다. '보노'가 저리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애착 인형 '보노'와 어떻게 헤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하긴, 열 살 언니가 되어야 헤어진다고 했으니, 앞으로도 육 년 후의 일이기는 하다.
오늘은 옷 입히기가 순조로웠다. 아내가 사 준 원피스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어제 제 엄마와 골라 놓은 그 원피스를, 아내가 가지고 와 보여주니, 군말 없이 입겠단다. 밥 먹기, 양치하기, 로션 바르기 등 일련의 등원 준비 과정도 아주 매끄럽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차 안. 뒷좌석에서 손녀딸과 아내의 역할 놀이가 시작되었다. 손녀딸이 엄마, 아내가 아가 역할이다. 오늘의 무대는 사탕 가게이다. 손녀딸이 두 밤 자고 나면, 사탕 가게가 문을 연다고 이야기한다. 두 밤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손녀딸이 "두 밤이 지났단다."라고 얘기하면 두 밤이 지나가게 된다. 무대장치가 따로 필요 없는, 우리나라의 마당극과도 같다. 둘의 대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손녀딸(엄마): 아가, 사탕 가게 문 열었단다.
아내(아가): 그래요, 엄마. 그럼 사탕 사 주세요. 빨리 먹고 싶어요.
손녀딸(엄마): 그래, 알았다. 솜사탕과 막대사탕이 있단다.
아내(아가): 솜사탕 사 주세요.
손녀딸(엄마): 안 된단다. 솜사탕은 엄마가 먹어야 돼.
아내(아가): 왜요?
손녀딸(엄마): 솜사탕은 어른들 거란다. 이 막대사탕 먹어.
아내(아가): 싫어요. 나도 솜사탕 먹을래요. 솜사탕 사 주세요.
손녀딸(엄마):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 사탕, 이쪽은 솜사탕이란다. 어서 먹으렴.
기가 막히게 상황을 정리했다. 네 살배기 손녀딸이 연출한 역할극은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그 상황에서 그런 대사가 튀어나올 줄은 정말 꿈에서도 몰랐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8시 55분이다. 손녀딸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는데, 때마침 노란색 통학 차량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내린다. 손녀딸이 그 아이들과 섞여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아이들은 다섯 살배기인 듯하다. 손녀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다. 우리 손녀딸, 제법 큰 줄 알았는데 그 아이들에 비하니 아직 아가다.
손녀딸 하원을 위해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3시 50분이 살짝 넘었다. 어린이집 문 밖에서 유리문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들 한 무리가 쏟아져 나온다. 손녀딸은 그 무리에 없었다. 대개 처음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또다시 열리고 손녀딸이 앞장서 나온다. 손에는 수박 모양의 공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종이로 만든 수박 모양의 모자 비슷한 걸 쓰고 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린이집 문 밖으로 나와, 아내와 나를 만나자마자 수박 모양의 모자를 벗어 젖힌다. 다시 쓰라고 해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수박 모양의 공은 손에 꼭 들고 있다. 모자는 무언가 좀 거추장스러웠나 보다.
손녀딸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공룡 놀이터에 가서 놀자고 했더니, 싫다면서 어린이집에 연해 있는 붕어 놀이터에 가겠단다. 손녀딸을 수박 모양 공을 들고 나는 손녀딸 손을 잡고 붕어 놀이터로 향했다. 미끄럼틀을 두 번인가 탔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서둘러 차로 달려갔다.
손녀딸이 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손녀딸 집으로 차를 몰았다. 시립 도서관 근처를 지날 때 손녀딸이 "도서관!"이라고 소리쳤다. 부랴부랴 유턴을 했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비가 오니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자고 했다. 손녀딸이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의외다. 시립 도서관에 갈 때마다 손녀딸이 내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곳이 있는데, 웬 일로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는 데에 동의했다. 손녀딸 왈, "지하 주차장도 상관없어." 우리 손녀딸이 한 뼘 더 큰 모양이다.
시립 도서관에 들어가서 할머니 옆에 딱 붙어 앉아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 달란다. 내가 읽어 준다고 해도 한사코 싫다며 할머니더러 읽어 달란다. 그렇게 제법 여러 권을 읽었다. 그러더니 진력이 났는지 집에 가자고 한다. 짐을 챙겨 나오려는데 갑자기 간식을 먹겠단다. 도서관 1층, 카페 옆에 간식을 먹을 만한 공간이 있어 그리로 갔다.
아내가 준비해 간 잼 바른 빵을 먹는데, 빵 부스러기를 흘릴까 봐 좀 조마조마하다. 다행히 거의 흘리지 않고 잘 먹는다. 아주 작은 빵이긴 하지만, 벌써 네 개째를 먹고 있다. 빵만 먹기가 심심한지 의자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며 먹는다. 안 되겠다 싶어, 손녀딸 손을 잡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도서관 밖으로 나가자마자, 손녀딸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뛸 수밖에. 도서관 밖에는 차도와 분리된 작은 공간이 있다. 나무와 풀과 꽃과 벤치가 있다. 그 사이를 손녀딸과 내가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손녀딸이 달리기 시합을 하자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대략 20미터 정도 돼 보였다. 손녀딸이 먼저 달린다. 나도 따라 달린다. 승자는 언제나 손녀딸이다. 그렇게 한 열 번은 왕복하며 달리기 시합을 한 듯하다. 제법 숨이 차다.
그러는 중, 딸내미한테서 전화가 왔다. 딸내미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한 것이다. 5시 20분이다. 이제 아내와 나도 손녀딸을 딸네 집에 데려다주고 퇴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