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딸네 집에 도착해서 손녀딸 방을 들여다보았다. 손녀딸이 침대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다. 혹시 깨어 있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적이 놓인다. 푹 자고 일어나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월요일, 한 주의 시작이다. 아내도, 나도, 손녀딸도 기분 좋게 한 주를 보냈으면 참 좋겠다.
손녀딸이 방에서 할머니를 부른다. 7시 40분이다. 손녀딸이 잠에서 깼다. 아내와 내가 달려갔다. 손녀딸은 일어날 생각은 없는지 침대에 누워 있다. 애착 인형 보노를 꼭 끌어안은 채. 아내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빠 손녀딸 방을 나가고 내가 손녀딸 옆에 누워 손녀딸을 토닥였다. 손녀딸은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렸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된 듯하여, 손녀딸에게 "할아버지가 안고 나갈까?"라고 물었더니 딱 한 마디만 한다. "할머니." 하는 수 없이 빨래를 정리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아내가 들어와 손녀딸 뺨에 뽀뽀를 하며 안고 나가려 하자, 손녀딸은 아내 목을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할머니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기록 작정한 듯한 모양새이다. 아내가 그 상태로 손녀딸을 안고 거실로 나오려 했으나, 손녀딸이 애착 인형 보노와 두 명의 공주 인형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손녀딸을 안기가 어려워 내가 손녀딸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면서 텔레비전을 틀어 주었다. 오늘 손녀딸의 선택은 '티니핑'이다. 요즘 손녀딸이 폭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9시 20분경, 애착 인형 보노와 두 명의 공주 인형과 티니핑 인형 하나를 들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손녀딸과 아내의 역할 놀이가 한창이다. 아내는 손녀딸의 친구 역할을 맡았고, 오늘은 구두가 없어진 상황인데 구두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손녀딸에 의하면 강아지가 구두를 물고 가 흙으로 덮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음번의 역할 놀이 상황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다. 손녀딸이 역할 놀이를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는데 같은 반 아이를 만났다. 가끔 손녀딸을 속상하게 했던 아이다.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반가운 척하며 그 아이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 아이의 표정이 뚱하다. 내가 자기를 못 마땅해하는 걸 눈치챈 걸까? 그럴 리는 없을 터이다. 내가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띠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으니까 말이다.
우리 손녀딸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들어가자며 손을 내민다. 참 사랑이 많은 우리 손녀딸이다. 어린이집에서 만나는 모든 같은 반 친구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우리 손녀딸이다. 가끔씩 자신을 속상하게 하는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우리 손녀딸이 기특하기만 하다.
그렇게 둘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을 통해 그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아이의 무표정한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원래 그렇게 무표정한 아이인지, 등원길에 엄마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여튼, 둘이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일이 있어, 손녀딸 하원시키러 어린이집에 혼자 갔다. 이럴 때는 평소보다 일찍 간다. 늦게 가면 주차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은 비까지 내리고 있다.
어린이집 밖에서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손녀딸이 앞장을 섰다. 내가 손을 흔드니 손녀딸이 활짝 웃으며 어린이집 밖으로 나왔다.
나를 보자마자 "할아버지, 멋져요."라고 한다. 웬 뜬금없는 소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침 일이 떠올랐다. 손녀딸에게, 할아버지가 오늘 머리 커트할 예정이라고 말하며,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손녀딸은 "예쁘겠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대화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손녀딸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신통방통한 우리 손녀딸이다.
차 뒷좌석 유아용 카시트에 손녀딸을 앉히고 버클을 채운 뒤, 간식으로 뭘 먹겠냐고 물었다. 싫다는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잼 바른 빵도, 귤도, 망고도 다 싫단다. 그러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겠단다. 집에 들렀다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자고 했더니 먼저 아이스크림을 사야 한다고 울상을 짓는다. 부랴부랴 아이스크림 가게로 차를 몬다.
집으로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다른 간식도 먹겠냐고 물으니 먹겠단다. 귤을 손으로 집어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다. 망고도 제법 많이 먹었다. 아까 하원길 차 안에서 싫다고 한 건,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한 손녀딸의 빅 픽처였나 보다.
딸과 사위 모두 일이 있어 좀 늦게 온단다. 2시간 30분가량을 나 혼자 손녀딸과 놀아주어야 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일단 아내가 일러준 대로 손녀딸 저녁밥을 준비했다. 소고기 뭇국에 만 밥이다. 밥을 먹이면서 털레비전을 틀어주었다. 이 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여준 적은 없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생각보다 밥을 잘 안 먹는다. 소고기가 질기다며 가끔 씹던 걸 뱉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혼잣말로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오시지?"라고 종알거린다. 손녀딸의 완벽한 존댓말이 할아버지 마음을 더 찡하게 했다.
손녀딸이 같이 놀자고 한다. 아내가 있으면 나와는 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손녀딸이다. 놀 상대라곤 할아버지밖에 없으니 저라고 어쩌겠는가. 거실에 있던 뽀로로 인형들로 역할 놀이를 하려는 듯했다. 그런데 시작하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뽀로로 친구 패티 인형이 없다고 울기 일보 직전이다.
큰일 났다. 패티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난 물건 못 찾기 올림픽이 있다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인 사람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물건도 못 찾고 허둥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지금은 기필코 찾아야 한다. 손녀딸 울음보가 터지기 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패티 인형을 찾았다. 책을 담아 놓은 바구니를 뒤졌는데 바로 거기에 그 인형이 있었다. 하늘의 도우심이 분명하다. 나는 패티 인형을 손녀딸에게 건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거 봐, 할아버지가 찾아준다고 했잖아." 손녀딸은 패티 인형을 손에 쥐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한 얼굴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뽀로로 인형으로 역할 놀이를 하고 놀이방으로 자리를 옮겨 공주 인형으로 역할 놀이를 했다. 할머니만큼 재미있게 놀이 상대가 되어 주지 못해서인지, 손녀딸이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 듯했다. 내가 좀 더 분발해야 한다. 역할 놀이에 흥미를 잃은 손녀딸이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열 개쯤 되는 퍼즐을 다 맞추었을 무렵 사위가 퇴근했다. 손녀딸이 매우 반가운 목소리로 "아빠~~!"하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