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 말로는 어제 일찍 잤다는데, 7시 30분이 넘도록 손녀딸은 단잠에서 깰 줄을 모른다. 8시가 되어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기에, 살금살금 손녀딸 방으로 들어갔다. 손녀딸에게, 피곤하냐며 더 잘 거냐고 물었더니, 몸을 휙 돌리며 "응."이라고 대답하고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좀 더 재워야 할 것 같아 조용히 손녀딸 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손녀딸이 거실에 나와 앉아 있다. 8시 30분이 다 되었다. 어린이집 등원이 너무 늦어질까 봐, 아내가 안고 나왔단다. 어린이집에서 동물 체험 행사가 있다고 9시 30분까지 등원해 달라는 부탁이 있는 터였다. 밥 먹이고, 옷 입히고, 머리 빗기고, 양치질시키는 등의 등원 준비를 마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손녀딸의 협조 덕에 순조롭게 등원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노란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었다. 손녀딸이 노란 치마를 나풀거리며 아파트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차림새가 마음에 드나 보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손녀딸과 아내의 역할 놀이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다. 손녀딸은 역할 놀이를 아주 좋아하는데, 손녀딸의 대사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곤 한다.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손녀딸의 상상력을 더욱 키워주어야 할 성싶다.
늦지 않게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거의 9시 30분이 다 되었다. 오늘따라 등원하는 아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손녀딸 혼자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손녀딸 혼자 의자에 앉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곧 한 아이가 들어오더니 손녀딸 옆에 앉는다. 손녀딸보다 한 살쯤 많아 보인다. 분홍색의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녀딸은 긴치마를 무척 좋아한다. 손녀딸이 옆에 앉은 아이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내일은 긴치마를 입혀 등원시켜야 될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가 일어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손녀딸 하원을 위해 어린이집에 왔다. 주차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늦게 오면 영락없이 이런 사달이 난다. 아내를 내려주고 한 바퀴 돌 작정으로 어린이집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어린이집 주변 도로를 두 바퀴째 돌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우러 오라는 신호다. 편도 1차선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손녀딸과 아내를 태웠다. 뒤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는데, 어린아이를 태우는 걸 보았는지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운전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차에 올라탄 손녀딸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나중에 아내에게서 들은 시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손녀딸은 신데렐라 인형을 가져왔냐고 물었단다. 등원할 때 손녀딸이 차에 놓아둔 인형이다. 당연히, 그 인형은 나와 함께 어린이집 주변 도로를 돌고 있는 중이다.
상황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할머니에게 골을 부렸단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운전하고 할아버지가 자기 옆에 앉아 자기를 안아달라고 하더란다. 아내가, 할머니는 운전면허증을 집에 두고 와서 운전할 수 없다고 둘러댔더니, 집에 가서 면허증을 가지고 오라고 성화였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딸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딸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녀딸이 응가를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때 딸내미가 퇴근해서 왔다. 제 엄마 목소리를 들은 손녀딸은 욕실 안에서 "엄마, 엄마, 엄마." 하며 연신 엄마를 불러댄다. 네 살배기 아이한테는 역시, 엄마가 최고인가 보다.
응가를 다하고 나온 손녀딸은 혼자서도 잘 논다. 아내가 딸에게, 손녀딸이 골 부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거실에서 놀고 있던 손녀딸이 어느 틈엔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놀고 있다. 조금 있다가 아내도 손녀딸 방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면서 보니, 둘이 마주 앉아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나중에 아내에게 손녀딸과 그때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다. 아내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야말로 빵 터졌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친구야, 니가 나한테 화낸 거 엄마한테 고자질해서 미안해."라고 했더니, 손녀딸이 아주 작고 조신한 목소리로,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라고 하더란다.
할머니한테 골을 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가 보다. 그러고 '더 미안하다'는 말은 어디에서 배웠을지 궁금하다. 동화책에서 배웠을까?, 아니면 어린이집에서? 아무튼 할머니와 손녀는 그렇게 아름답게 화해를 했다.
아내는 그림 그리러 미술 학원에 가는 날이고 손녀딸은 수학 놀이터에 가는 날이다. 아내는 차로 미술 학원으로 출발하고 나와 딸내미가 손녀딸을 수학 놀이터까지 데려다준다. 뒤에서 밀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세발자전거에 손녀딸을 태우고 수학 놀이터로 출발했다. 내가 뒤에서 자전거를 밀며 가고 있는데 손녀딸이 뭐라고 한다. 잘 들어보니, 자기 혼자서 갈 수 있다는 소리다. 내가 힘을 빼니 손녀딸 혼자서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몇 바퀴 굴렀으나 앞으로 쭉쭉 나가지는 않는다. 아직 요령을 잘 모르나 보다. 좀 더 연습이 필요할 듯하다.
금세 수학 놀이터에 도착했다. 수학 놀이터 문 앞에서 손녀딸과 바이바이를 한다. 집으로 향한다. 퇴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