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보낸 한평생

이런 학교, 어디 없나요?

by 꿈강

가끔 이런 실없는 상상을 한다. 직원회의 석상에서 교장이, "선생님들, 선생님들께서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할 수 있을지만 고민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모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렇게 말하는 교장을 본 적이 있냐고? 물론, 당연히 없다. 우리나라 어디엔가는, 이런 교장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만나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퇴직을 앞두고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만발해서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이다. 교직 생활 내내 해결하지 못한 의문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학교에서는 왜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을까?"


학교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수업'이라고 말할 것이다. 학생들과 호흡을 맞춰 수업을 잘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학교에 있겠는가? 학생 생활지도, 학부모 상담, 지역사회 연계 교육, 학생 맞춤 교육과정 운영, 학교 급식 등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어떤 교육 활동도 수업보다 그 중요성이 더하다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교 관리자 중에서 수업을 잘하자고 독려하며 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을, 나는 만나보지를 못했다. 또한 교사들끼리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도 잘 보지 못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학교에서의 수업은 마치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와 같은 존재여서 굳이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듯하다. 공기가 없으면 인간이 죽는 것처럼 수업이 없으면 학교는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수업을 잘하자고 강조하지 않아도 교사들이 학교를 살리기 위해 수업을 잘하려고 할 테니 수업을 그렇게 강조할 필요를 못 느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삼척동자가 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터이다. 모든 교사가 수업에 관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막 교단에 서는 신출내기 교사를 수업 전문가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교사는 수업이라는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보아 수업 전문가라 부를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면 신출내기 교사들이 수업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존재해야 하는데, 교육 현장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신규 교사들의 수업 능력을 높여 줄 제도적 장치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규 교사들은 수업 중에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며 좌충우돌 각자도생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직 사회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차고 넘쳐 다른 사람의 수업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이 또한 말이 안 된다. 교직 생활을 돌이켜 보면, 수업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교직 생활 5~6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담임교사로서, 야간자율학습을 학생들의 희망을 받아 운영하고 싶었다. 이 또한 매우 우습다. 자율학습이므로 희망을 받아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마땅하고도 옳은 일일 텐데,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희망을 받는 척만 했다. 야간자율학습 희망서를 나누어 주고, 모두 희망에 동그라미 치고 학생 서명, 학부모 서명을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걷었다. 그래서 나는 희망서를 나누어 주고, 집에 가져 가서 부모님과 상의한 후 그다음 날 희망서를 제출하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학년 부장 교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우리 반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다른 학급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형평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 한 가지 사례만 보아도 교직 사회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차고 넘치는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담임교사에게 그 정도의 권한도 부여하지 않고 학년 전체, 아니 학교 전체가 똑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강요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학교는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을까? 도저히 까닭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35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지만 교사들과 오롯이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한 시간은 통틀어야 10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다른 교사들에 비해 아주 게을러 학교 내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에 빠졌거나, 아니면 다른 교사들이 나만 따돌리며 자기들끼리만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물론 우리나라 전체로 범위를 확대해 보면, 교사들끼리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런 모임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활성화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는 내가 참여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누군가가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런 모임에 열심히 참여한 교사도 분명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업에 관한 이야기가 전국 단위의 모임이나 시도 단위의 모임에서만 이루어져서는 곤란하고 각 학교 단위에서 일상적으로 수업에 관한, 수업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각 학교 단위에서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고, 그 누구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 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는 말이다.


2년 전쯤, 내가 용기를 내어 우리 학교 전체 교사에게 오롯이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제안한 적이 있다. 55명 정도의 교사 중, 14명 정도가 관심을 보였고 첫 모임에 9명 정도가 모였다. 그러나 두 번째 모임에 3명이 모이더니 세 번째 모임에는 아예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 또한 까닭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이 어떻게 수업하는지를 다른 교사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게 부담이 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때도 맨 먼저 내가 나의 수업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버린 기억만 오롯하다. 그러고는 다시 모임을 하자고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8월 말 명예퇴직을 기다리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교사는 수업으로 성장하고,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학교에, 교사에게 수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교사 개인 개인이 자신이 수업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기는 한다. 그러나 개인의 분투는 명백한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분투하고 있는 개인의 힘을 한군데로 모을 수 있는 학교의 혜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늘도 푸념만 실컷 늘어놓았다. 문득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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