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 사는 / 살아갈 이야기

뼛속까지 문과 적성이 이과를 선택했을 때 일어나는 일

by 꿈강

1977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당시의 고등학교에서는 진학 지도 또는 진로 지도라는 개념은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꿈은 없었고 막연히 신문 기자가 되려는 생각은 했었던 듯싶다. 그냥 좀 멋져 보여서...


2학년에 올라갈 즈음 문과, 이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문과 가면 굶어 죽기 십상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뼛속까지 문과 적성이었던 나는 고민 끝에,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서울에 있는 공립 남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선택 결과 문과가 2반, 이과가 9반으로 이과 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게 이과생이 되었다.


문제는 2학년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이과 수업을 받으면서 생겨났다. 시간표는 온통 수학과 과학으로 범벅이었다. 아주 가끔 영어와 국어 수업이 들어오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도대체 선생님들이 무슨 이야기를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네 가지 과학 과목 모두를 필수로 들어야 했다. 숫자와 기호와 공식의 세계 속에서 나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2학년에 올라가 처음 본 모의고사 성적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 국어, 수학, 영어는 50점 만점, 과학 과목은 15점 만점이었다. 국어와 영어는 50문제, 수학은 25문제, 과학 과목은 15문제가 출제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많이 부끄럽지만 생각나는 대로 고등학교 2학년 나의 첫 모의고사 점수를 밝혀 보겠다. 수학 24점, 물리 3점, 화학 5점, 생물 14점, 지구과학 9점! 참담한 결과였다. 그 다음번 모의고사 성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민 끝에 담임을 찾아갔다. 도저히 이과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문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담임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학교 방침상 한번 선택한 과정을 바꿔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땐 그랬다. 한번 선택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하릴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 고군분투했으나, 수학과 과학 성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국어, 영어, 국사, 윤리 등의 과목에서 받은 점수로 근근이 성적을 유지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런 상태로 대학 진학을 위해 예비고사를 보았다. 그때는 예비고사를 치르고 대학별 본고사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시스템이었다. 예비고사는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이었고 대학별 본고사는 국어, 영어, 수학을 중심으로 하는 주관식 시험이었다. 예비고사는 문과 쪽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고사와 이과 쪽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고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이과 쪽 예비고사에 응시했고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다.


그 당시에는 지역별로 예비고사 커트라인이 달랐다. 당연히 서울 지역이 예비고사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는데, 나의 점수는 서울 지역 예비고사 커트라인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다. 이 정도의 예비고사 성적으로는 아무리 본고사를 잘 치르더라도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의 거의 없었다. 물론 지방 대학으로 진학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을까 고민하다가, 서울교대에 지원했다. 합격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예상 커트라인과 내 예비고사 점수와의 차이는 무려 40점 가까이 났으니 말이다. 서울교대에 지원한 이유는 단 하나. 그때 서울교대는 오로지 예비고사 점수로만 신입생을 뽑았다. 어차피 떨어질 테니, 굳이 본고사에 응시하기 싫었는데 그렇다고 아예 원서를 내지 않으려니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듯싶다. 그래서 본고사를 보지 않은 서울교대에 원서를 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나는 교육계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연히 서울교대에 떨어지고 재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0년의 일이다. 그때 이런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 사수는 국가 판단.' 남자의 경우 사수를 하려면 군대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사수는 국가 판단'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수를 하면서는 자연스럽게 문과로 방향을 틀었다.


수학은 훨씬 쉬워졌고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대신 국토지리, 인문지리, 사회문화, 세계사 등의 과목을 공부했는데, 과학 과목에 비해 사회 과목은 나에게 정말 공부하기 편했다. 신세계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모의고사를 보면 고등학교 때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수학이었다. 문과 수학 예비고사는 그럭저럭 해 보겠는데, 대학 본고사 수학은 해결할 수 없는 크나큰 장벽이었다. 본고사는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 시험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7월쯤으로 기억한다. 학원을 마치고 거리를 걷고 있는데 호외 한 장이 팔랑, 내 발치로 날아들었다. 호외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발행하는 신문을 일컫는 말이다. 주워 보니, '영단! 대학 본고사 폐지!'라고 대문짝만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약간 작은 글씨로 예비고사도 없애고 학력고사를 실시하며 학력고사와 고등학교 내신성적을 합산하여 대학 신입생을 뽑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해 예비고사를 불과 석 달쯤 앞두고 대입 전형 방법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또 졸업정원제를 적용한다며 대학 신입생을 정원의 130%에 해당하는 인원을 선발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건 차라리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조치였다. 그러나 그땐 그랬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이 모든게 가능한 시대였다.


그렇게 나는 예비고사 마지막 세대이자 학력고사 첫 세대가 되었다. 그해 처음으로 실시한 학력고사를 치르고 지방 국립사범대학 인문계열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가 재수하면서 문과로 전향하여 대학 입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종종 들려 준다. 특히 문과 쪽 학과로 진학할지 이과 쪽 학과로 진학할지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요즘도 '문송'이니 '인구론'이니 하는 말이 세간에 떠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문계 90%는 논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먹고 사는 관점에서 보면 이과 쪽 학과로 진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같이 뼛속까지 문과인 경우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이런 사람은 고등학교 이과 공부도 하기 버겁거늘 대학 이과 공부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무언지 잘 생각해 보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한다. 물론 하고 싶은 게 무언지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이 뼛속까지 문과 적성인데 순전히 취업만을 생각해서 이과를 선택하면 공부하는 과정이 정말 괴롭다. 아니 어쩌면 공부를 아예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문과 쪽 학과로 진학하면 대학 졸업 후 취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문과 적성인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문과 적성인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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