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이 없어야 학교가 산다
교직 생활 동안 꽤 여러 명의 교장을 만났다. 지방 소도시 공립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단위 학교에서 교장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무소불위, 천하무적, 절대 지존 등의 단어들을 갖다 붙여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학교에 미치는 교장의 힘은,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나라에 미치는 힘보다 강력하다고 해도 그리 그른 말은 아니다. 대통령에게는 야당이라는 강력한 반대파가 존재하지만 교장에게는 그런 반대파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교장이 학교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교장을 만나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대다수 교장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관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경향을 보이기 일쑤였다. 교장이 생각해서 옳으면 그게 옳은 게 되었다. 물론 교장도 교감과 몇몇 부장 교사들의 의견을 참고하겠지만 그들의 의견은 교장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그들의 의견이 설령 교장의 그것과 다르더라도 교장의 의견을 듣는 순간 그들의 의견은 순식간에 교장의 그것과 같아지므로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겠다.
내가 겪은 몇 가지 사례를 이야기해 보겠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의 의사결정이 그토록 비민주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리라 생각한다.
'입학 전 전입학'이라는 제도가 있다. A도 소재의 고등학교에 합격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전가족이 B도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B도 소재의 고등학교로 고등학교 입학 전인 2월에 전입학할 수 있는 제도이다. 2008년 내가 근무하던 고등학교에 입학 전 전입학을 요청한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런 지역의 전입학 허가권자는 학교장이다.
전입학을 담당하는 교무 부장 교사와 친분이 있어 그것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무 부장을 처음 맡은 그는 이 사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수년 동안 교무 부장을 맡은 경험이 있던 터였다. 교무 부장을 맡는 동안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관련 규정을 확인한 다음 한 학생을 고등학교 입학 전에 전입생으로 받았었다. 조언을 구한 후배 교무 부장 교사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고는 이 일을 까맣게 잊었다. 그해 1학년을 담당했는데 개학 첫 주 어떤 반 수업을 들어갔더니 전입생이 한 명 있었다. 대개의 학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근무했던 그 학교도 가나다 순으로 학급 번호를 부여했다. 학생의 성씨로 보아 중간 정도의 번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 학생의 번호가 맨 나중인지라 전입생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그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학생이 입학 전 전입을 요청한 사실을 알았다. 2월에 전입학 가능 여부를 타진했는데 입학 전 전입학은 불가능하니 일단 합격한 학교에 입학한 뒤 전입학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자초지종이 궁금해 후배 교무 부장에게 물어보았다. 교장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입학 전 전입학은 여러모로 복잡하니 입학 후 전입학을 받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입학 전에도 전입학을 받으라는 교육청 업무 지침은 교장 한마디에 가볍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가족이 모두 이사한 터라, 그 학생은 전입한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비록 그 기간이 하루 이틀에 불과했더라도 입학 전 전입학 규정을 따랐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아니겠는가.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정기 고사(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매우 중요하다. 그 성적이 대입 전형에서 중요한 요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시험 문제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시험 문제 출제에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못된 시험 문제가 종종 출제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복수 정답으로 처리(애초의 정답 이외에 다른 하나를 더 정답으로 인정)하는 방법과 그 문제를 다시 출제하여 재시험을 보는 방법이다.
전자의 방법이 가능한 상황이면 전자를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만 후자를 따르는 게 상식과 합리에 들어맞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전자는 성적관리위원회 회의 한 번만 하면 시행할 수 있지만 후자는 회의하고 문제 다시 출제하고 게다가 따로 시험 시간을 잡아야 시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2년, 새로운 학교로 옮겨 가니 그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가 잘못 출제되었을 경우 무조건 재시험을 본다고 했다.
이유가 뭐냐고 동료 교사들에게 물었더니 교장 방침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방법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의 방침은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교장에게 재고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교육청 평가 담당 장학사에게 질의를 했다. 성적관리위원회 회의를 통해 복수 정답으로 처리하거나 재시험을 보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는 회신이 왔다. 회신 결과를 들고 교장실을 찾았다. 그건 장학사 개인 생각이라며 우리 학교는 무조건 재시험을 보겠다는 교장의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교육청 누리집 질의응답란을 통해 공식적으로 질의하여 얻은 답변을 개인 생각으로 치부하다니! 그 교장의 논리 회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교장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재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교장이 부임하기까지 그 학교에서는 계속 재시험을 보았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했냐며 시험 문제가 잘못 출제될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복수 정답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이렇듯 교장이 바뀌지 않는 한 그 교장의 결정을 바꿀 방법은 없다.
두 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교장 생각에 따라 학교 일이 결정되는 사례는 이 이외에도 비일비재했다. 부장 교사 협의회나 교직원 회의에서 오랜 논의를 거쳐 결정된 일도 교장이 뒤집어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면 방법이 없다. 학교에는 교장의 결정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교장에게 전적으로 결정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교장이 현인(賢人)이 아닌 이상 늘 올바르게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학교 모든 일이 교장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되면, 교장은 자신의 판단이 옳으리라는 착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교장이 학교 내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위원회나 협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제도를 고쳐야 한다. 지금은 각종 위원회나 협의회의 결정은 참고 사항일 뿐이다. 교장이 뒤집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럴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위원회나 협의회에서 진지한 토론을 거쳐 결정된 사항이 교장 한마디에 뒤집히는 지금의 체제에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서 합리성을 찾기는 매우 어려울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