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교사들에게 권(勸)함.
30년 넘게 지방 소도시 일반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고교 내신 성적 산출 방식과 대입 전형 제도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그 방식과 제도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깊이 고민하여 설계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방식과 제도 취지는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흔히 왜곡되곤 했다.
평가 방식에는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절대 평가는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를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방식이고 상대 평가는 한 집단 내의 다른 구성원과 비교한 상대적 위치로써 개인의 학력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절대 평가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대입 전형 시의 변별력 확보 측면에서는 상대 평가 방식이 효율적이다.
그래서인지 1989년에 교직에 발을 들여 2024년에 교직을 그만두기까지 우리나라 고등학교 내신 성적 산출 방식은 주로 상대 평가에 바탕하였다. 한때 절대 평가 방식이 도입된 적이 있었다. 2002년 경에 시작하여 수년 동안 지속한 것으로 기억한다. 절대 평가 방식은 그리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절대 평가 방식이 오래가지 못한 까닭은, 고등학교 교사들이 절대 평가 방식의 취지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절대 평가 방식에 따르면 90점 이상이면 '수', 80점 이상이면 '우', 70점 이상이면 '미', 60점 이상이면 '양', 60점 미만이면 '가'로 평가하게 되어 있었다. 절대 평가 방식의 취지를 살리려면 시험 문제 난이도를 적정하게 조절하여 중간 점수대 학생들이 다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즉 '미'를 받는 학생들이 가장 많고 '우'와 '양'이 그다음, '수'와 '가'가 그다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절대 평가 방식이 적용되던 그 당시 내가 근무했던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의 성적 분포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특정 과목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나타난 일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수' 또는 '우'를 받았다. 시험 문제를 지나치게 쉽게 출제했던 것이다. 학교 차원에서의 은근한 압박이 있었다. 시험 문제 출제 기간이 되면 직원회의 시간에 교장이나 교감은 으레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적정하게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적정하게'라는 말과 조응하는 교장이나 교감의 다음 말은, 학생들이 대학 진학에 불리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교사들은 '적정하게'라는 말을 '쉽게'라는 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제대로 '적정하게' 출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일단 시험 문제를 다 출제한 다음 다시 한번 문제를 꼼꼼히 검토하여 학생들이 좀 더 쉽게 정답을 고를 수 있도록 문제를 수정하느라 땀 흘린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는 학생들이 보기에 '정답이 손을 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문제를 쉽게 내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험 문제 쉽게 내기' 다른 말로 '성적 부풀리기'라고 하는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대입 전형에서의 변별력을 상실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절대 평가 방식은 상대 평가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때 교사들이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적정하게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만일 그 당시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했다면 교육적 관점에서 좀 더 바람직한 절대 평가 방식이 우리나라 고등학교에 안착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수업 풍경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터이다.
고교 학점제에 따라 고등학교에 절대 평가 방식이 일부 도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예전 기억이 떠올라 몹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성적 부풀리기가 만연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학생들 대학 진학에 불리하지 않도록 시험 문제를 출제하라는 학교 측의 은근한 요구가 있을 테고 교사들은 마지못한 척 그 요구를 따르는 현상이 염려된다.
현직에 있을 당시 학교 측의 은근한 요구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 게 못내 후회된다. 절대 평가 방식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데에 일조를 했으니 말이다. 지금 현직에 있는 후배 교사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한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적정하게 유지하라고! 학교 측의 은근한 요구에 절대로 흔들리지 말기를! 본인 혼자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생각하지 말자. 주위 교사들 모두가 학교 측의 요구를 따르더라도 꿋꿋이 자기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한다면 절대 평가 방식이 언젠가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에 안착할 수 있을 터이다. 교사들의 생각과 의지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