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의 시집을 다시 읽는 시간
백석 시집을 다시 읽다 2
앞서 백석 시집을 다시 읽고 다섯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았었다. 시 전문을 가만가만, 나직나직 읊으며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헌데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백석의 시집에는 참 좋은 시들이 넘쳐난다. 몇 편 더 읽어 보자. 타오르는 불을 보며 멍 때리듯, 시를 읽으며 가끔씩 세상 시름을 잊어 보자. 불멍이라는 게 있으면 ‘시멍’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시멍시멍’해 보자.
먼젓번과는 달리 시 전문을 소개한다. 시의 일부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백석 시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도 그대로 두었다. 표준어가 전하지 못하는 시의 맛을 곱씹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 볏짚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 어늬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삼천포> 전문
평화롭고 따사로운 정경이다. 도야지새끼들이 졸레졸레 간다. 아마도 어미 돼지가 앞장섰으리라. ‘졸레졸레’ 간다고 했으니, 도야지새끼들의 방둥이가 살랑살랑거렸을 듯싶다. 그 광경을 귀밑을 재릿재릿하게 하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바라보고 있다. 흙담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말이다. 모르긴 해도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입가에는 미소 한 줄기쯤 머금었으리라. 시선을 천천히 돌려 보니, 소 한 마리가 기르매(등에 얹는 안장)를 지고 게으른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조을고 있다. 이런 광경을 떠올리면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풀어지기 마련이리라. 아, 그런데 모두들 가난하다니. 짠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따사로이 가난하단다. 그때는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을 터이다. 가난한 풍경에 따사로움 한 줌. 가난을 조금은 눅여 준다. 부족함 없이 사는 지금과 가난하지만 따스함이 있던 그때를 견줘 보는 건 어떨까?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 명태는 꽁꽁 얼었다 /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 소리> 전문
춥다. 몹시 춥다. 말리려고 처마 끝에 매달아 논 명태가 꽁꽁 얼었다. 꽁꽁 언 명태를 보며 화자는 서러움을 느낀다. 차가운 날씨와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인해 화자도 명태처럼 꽁꽁 언다. 명태는 처마 끝에서, 화자는 문턱에서. 명태는 꼬리에 고드름을 달고, 화자는 가슴에 고드름을 단 채로. 이 시는 이게 다인가?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어, 왜 제목이 멧새 소리지? 라는 의문이 든다. 멧새는 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멧새는 시 밖에서 울고 있을 터. 시 밖에서 울고 있는 멧새 소리가 시 안으로 흘러와 화자에게 들려오는 것이다. 아마 그리운 사람을 두고 온 방향에서 멧새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서럽고 더더욱 추워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을 달고 꽁꽁 얼어가며 문턱에 앉아 소리 나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눈이 많이 와서 /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 한가한 애동들은 여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 이것은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녑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 하로밤 뽀오햔 힌김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싸히는 여늬 하로밤 / 아배 앞에 그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 오는 것이다 /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 먼 녯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 전문
산새가 먹이를 찾으러 들판으로 내려오고 재빠른 토끼도 가끔 눈구덩이에 빠질 정도로 함박눈이 함빡 내린 겨울 어느 날. 산골 마을은 은근히 흥성흥성 들뜨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이 예부터 반가워하는 상대이다.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 바로 국수다. 우리는 냉면이라고 부른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도 정주. 거기에서는 냉면을 국수라고 부르나 보다. 누군가가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냉면 만들어 먹는 날, 온 마을이 구수한 즐거움에 싸여 들뜬다고 하니 말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언제 한번 엄청 추운 겨울날에 평양냉면을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한 번도 한겨울에 냉면을 먹어보지는 않았다. 칼국숫집을 먼저 찾아 들어가게 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잘도 쪽쪽 거리면서도 말이다. 올겨울에는 진짜로 한겨울 평양냉면 먹기에 도전하리라. 슴슴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나와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리라.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이 흰 바람벽에 /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 이 흰 바람벽에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 이 흰 바람벽엔 /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 가득 찬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릉 위로하는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지치고 지친 화자가 축 처진 채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맞은 편에 흰 바람벽이 있다. 힘없이 흰 바람벽을 바라본다.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가는 흰 바람벽. 가난한 늙은 어머니는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 맨손으로 무와 배추를 씻고 있다. 아주 잠깐 동안 지어미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 먹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곧 혼자임을 깨닫고 다시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엄습한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한다. 하늘이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도록 만들어졌다고. 아,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가슴이 저릿저릿해진다. 화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리다. 바삐 사노라면 결코 생겨나지 않는 감정이다.
시를 읽으며 시에 나타난 상황을 떠올리며 시적 화자의 처지에 공감해 보자. 평화롭고 정겨운 장면에 나오면 빙그레 미소가 돌고, 처절하도록 슬프고 아픈 화자의 처지를 만나면 가슴이 저릿할 것이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고 오롯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 보자. 다시 세상 속으로 달려나갈 힘이 생길 수도 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