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보낸 한평생

수업량 유연화 주간을 아시나요?

by 꿈강

수업량 유연화 주간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갑툭튀라 할 만하다. 수업량 유연화라는 말을 들은 건 2~3년쯤 된 듯하다. 한마디로 교육부에서 정한 수업량을 줄여서, 기말고사 이후 기간에 학교 자율 교육과정을 운영해 보자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주당 1단위 과목의 경우, 한 학기에 17주 동안 17시간을 활용하여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을 가르쳐야 한다. 이럴 경우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16주 동안 16시간을 활용하여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을 다 가르치고 나서, 1주 1시간을 확보하여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왜 수업량 유영화 주간을 운영하려 할까? 내 생각에 이유는 딱 하나다. 학생부종합 전형(학종)에 대비하여 학교생활기록부의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좀 더 잘 적어주기 위해서이다. 학교생활기록부의 세특 기록은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과세특)란과 개인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개세특)란으로 나뉜다. 둘 다 500글자(1500바이트)까지 기록할 수 있다.


과세특에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한 각 과목 수업에서 관찰한 내용을 적게 된다. 수업량 유연화 주간은 개세특을 쓰기 위한 교육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수업량 유연화 주간에는 교과 융합 또는 교과 심화 활동을 할 수 있는데 개세특에 쓸 수 있는 활동은 교과 융합 활동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점은 과세특은 한 학기 동안의 활동을 기록하는데 비해 교과 융합 활동을 하고 기록하는 개세특은 딱 일주일 동안 활동한 것에 바탕한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동안 활동했지만 개세특을 제한 글자 수인 500자까지 꽉꽉 채워야 유능하고 열정적인 교사로 평가받는다. 한 학기와 일주일의 교육 활동 내용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추진한 수업량 유연화 주간에 대해 좀 살펴보자. 수업량 유연화 주간이라는 말보다는 학교 자율 교육과정 운영 주간이라고 해야 좀 더 직관적이어서 그렇게 불렀으면 좋겠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 어쩔 수가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있어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운 명칭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수업량 유연화 주간에는 개세특을 쓰는 데 방점이 찍힌 교육 활동이 전개되므로 담당 교사는 교과 융합 활동을 계획해 달라고 압박한다. 물론 나같이 끝까지 거부할 수는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교과 융합 활동을 해야 학생을 위하는 교사라는 이야기를 은연중에 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대로 교과 심화 수업을 하겠다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과 융합 수업도 교과 심화 수업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런 선택지는 없다.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간 사명감 없는 교사로 낙인찍힐 게 자명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 학교의 대부분 교사들이 교과 융합 수업을 하겠다며 수업 주제를 정했다. 2학년에 개설된 교과 융합 수업 주제를 살펴보자.


'영화 속 물리와 수학' <물리학 + 수학>

'사랑은 정말 기술일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영문 원서 읽기 및 탐구' <영어 + 생활과 윤리>

'수능 영어의 생물 이야기 탐구' <영어 + 생명과학>

'공학적 도구를 활용하여 기하와 인공지능 수학 탐구하기' <기하 + 인공지능 수학>

'초등 문학 수업 설계 및 수업 실연' <문학 + 교육학>

'한시를 이해하고 창작하기' <중국어 + 문학>


물리학과 수학 융합인 '영화 속 물리와 수학'이라는 주제로 과연 교과 융합 수업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특정 영화 속에 적용된 물리학이나 수학의 원리를 찾는 수업이 진행될 듯하다. 어떤 지점에서 융합이 일어날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주제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영문으로 읽고 탐구하겠다며 영어와 윤리 교과의 융합이라고 한 것도 어떻게 교과 간 융합을 시도할지 주제만 보고는 알 수 없다. 그냥 영문 도서를 읽는 활동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교과 심화 활동으로 바꾸어야 마땅하다.


'수능 영어의 생물 이야기 탐구'도 수능 영어 지문 가운데 생물과 관련한 지문을 읽는 활동을 하겠다는 소리이다. 생물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영어 지문을 읽는다고 교과 융합은 아니지 않겠는가?


'기하와 인공지능 수학 탐구하기'는 애당초 교과 융합일 수 없다. 기하도 인공지능 수학도 모두 수학 교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인공지능이라는 교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 과목 간 융합 활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활동의 결과는 개세특이 아니라 과세특에 기록해야 옳다.


문학과 교육학 간의 융합을 표방한 '초등 문학 수업 설계 및 수업 시연'은 국어 교과와 교양 교과의 융합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 수업을 설계하고 수업 시연을 했다고 교육학과 융합 수업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굳이 교육학과 융합하지 않아도 문학 과목 그 자체에서 얼마든지 문학 수업을 설계하고 수업 시연을 할 수 있다. 또 왜 하필 초등 문학 수업일까? 고등학교 수업이니 고등학교 또는 중학교 문학 수업을 설계해야 자연스럽지 않은가? 아마도 교육대학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주제를 설정한 듯하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지 몹시 궁금하다.


'한시를 이해하고 창작하기'는 중국어 교과와 국어 교과의 문학 과목 융합을 시도한 활동이라 하겠다. 아마도 한시 이해는 중국어 교과의 영역이고 창작은 문학 과목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한시를 창작하는 활동이 어떻게 국어 교과와 연결되는지 알 수가 없다. 국어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한시 창작 수업을 해본 적은 없다. 또 고등학교 학생들의 중국어 실력으로 한시를 창작할 수 있을지도 매우 의문이다. 이 활동도 교과 융합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만약 중국어 교사가 한시 창작과 관련한 수업을 학기 중에 진행했다면, 그에 대한 교과 심화 활동으로 계획하여 운영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교과 융합 활동에 걸맞은 주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수업량 유연화 주간을 설정하여 학교 자율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전제하고 모든 교사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들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밀려서 해야 했기에 벌어진 현상 아니겠는가.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어쩌면 매우 간단하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게 하면 된다. 그 사람들이 제대로 된 교과 융합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이 활동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 둘 수업량 유연화 주간의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터이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기간의 성과에 매몰되면 형식적인 활동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아무런 영양가 없는 활동만이 공허하게 진행될 뿐, 학생도 교사도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수업량 유연화 주간은 기말고사 이후의 죽은 기간을 살려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교육활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활동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려면 좀 더 촘촘한 계획을 수립하여 교사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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