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최승호 시선, <대설주의보>에서

by 꿈강

김우창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최승호 시인의 시의 특징은 뛰어난 사실적 관찰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비시적(非詩的)으로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라고 한다. 또 최승호 시인의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극도로 막혀 있는 삶의 상황이란다. 김우창 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최승호의 시를 읽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 와닿은 시를 찾으며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폭풍우에 휩싸인 채

정전된 밤의 도시

검은 아스팔트 검은 강

상점마다 촛불이 가물거린다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그것은 번갯불로 충전된 푸른 도끼다

때리면 별들이 힘차게 빛난다

때리면 산이 쩌렁쩌렁 운다

때리면 난쟁이들쯤이야

하지만 거신족(巨神族)이 아닌 이상 그런 도끼를

함부로 휘두를 만한 인간이 그 어디 땅 위에 있겠는가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채석장

혹은 옛날 스타일로

교미하는 용 한 쌍 얽힌 듯

질투하는 발톱 큰 용 한 마리 더 얽힌 듯

먹비늘을 긁어대는 빛의 발톱

먹비늘을 뜯어 뱉는 빛의 이빨

벼락불이 떨어진다 천둥이 친다

고압선이 얽힌 도시의 하늘을

내리찍는 불의 시퍼런 도끼

기억해 두자 저 얼크러져 꿈틀대는 밤의 힘

비록 내가

거신족의 식탁을 위한 한낱 제물에

혹은 밤이 낳고 밤이 먹는

밤의 아들에 불과하다 해도

세찬 빗발이 나를 두드리고

내가 다시 싱싱해지고

나의 두개골 안에

불타는 가시덤불의 거센 불길이

느껴지는 이 싱싱한 밤을

- 최승호, <밤의 힘> -




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오르는 날개 들과 물방울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 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 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 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어

갈아 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늙은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음침한 기침을 하면서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을 쉴 것이다

- 최승호, <나는 숨을 쉰다> -



나는 내 시의 경작지에

종이 공장을 하나 세워놓는다

보이지 않는

종이 인간들이 일하는 종이 공장을


그리고 종이 공장을 겹겹의

섬세한 가시철망으로

삥 둘러막는다

종이 인간들이 도망치치 못하도록


그럴 줄 알았다

그새 나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안 보이던 종이 인간들이 투명한

품삯을 달라고 가시철망에 달라붙고 있다


골이 났는지

종이 가슴들을 찢어 열어젖히고

두 손을 집어넣어

종이 조각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어떤 종이 인간은

제 몸에 불을 지로고 있다

- 최승호, <종이 공장> -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아름드리나무가 넘어진다

긴 톱과 날이 선 도끼를 손에 쥔

건장한 벌목꾼들

그들은 나무 밑둥을 찍고 있다

베고 있다 목을 벤

이차돈의 힘차고 진한 흰 피를

어떤 죽음이 생의 완성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나무가 넘어진다 곧은 나무가

아름드리 무게만큼 숲 속 깊이 쿵 소리를 울리면서

넘어진다 곧바로 넘어진다

장자(莊子)의 나라의 꾸불꾸불하고

밑둥이 텅 빈 거대한 가죽나무

그 병신 가죽나무는 베이지 않고

오래도록 신인(神人)처럼 거대하게 자랐다 한다

장자가 잘 읽히는 시대일수록

나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곧은 나무가 넘어진다 톱의 힘이다

도끼의 힘이다

밑둥의 싱싱하게 젖은 톱밥을 흘리면서

흰 뿔 모양의 나무조각들이

도낏날에 찍혀 튀어나오며 나무가 넘어진다

벌목이 끝난 뒤에 어둠 속으로

노을을 지고

가라앉는 헐벗은 산의 긴 침묵을

침묵하여 생각하는 동안

연거푸 곧은 나무들이 쿵쿵 넘어진다 넘어진다

- 최승호, <벌목> -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면 방안은 어둠

들여다볼 수 없고 붙잡을 데 없는 텅 빈 칠흑의 어둠

나는 텅 빈 공간을 떠내려가는 지구인이다

대한국민이다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결실이 아니라

악몽을 정리하는 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당신 사람이요 깻망아지요

배를 깔고 엎드린 나에게 흐린 목소리가 묻는다

몇 시나 되었을까

베갯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칠흑의 어둠 구석 야광시계의 둥근 유리알 속에서

푸른 열두 개의 숫자들이

일그러진 애벌레들 모양 귀기 서린 빛을 뿜는다

당신 사람이요 넙치요

나는 지옥이 어딘지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여

북어처럼 힘 못 쓰는 인간들이

북어 대가치처럼 입을 찢어질 듯이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어떤 텅 비고 커다란 아가리 속으로 떨어지는지

쇠망치에 얻어맞은 못대가리처럼

찌든 내 큰 골로는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베갯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왜 이렇게 밤은

영영 날이 새지 않을 것처럼

길게 계속되는 것일까

- 최승호, <깊은 밤> -



문을 열자

바다코끼리의 긴 이빨처럼

고드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아침 숲 속에서

고요의 해일이

귓속으로 차갑게 밀려 들어왔다

꽝꽝하다 이 겨울

묵은 눈 덮인 산들은 빙산만큼씩 한 흰 봉우리들을

치켜들과 우뚝 솟아오르고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고 항아리에

마을 아낙네들이 물을 긷는다

꽝꽝하다 이 겨울

산들은 문을 닫고

다람쥐는 얼음 깊이 잠들어 있다


무너지듯 산비탈을 미끄러지며

녹아내리는 눈더미와 덩치 큰 얼음장들이

화강암덩어리의 이 산 저 산을 치받을 때

골짜기 가득 쩌렁쩌렁한 산의 울음소리

울려 퍼질 그 봄날까지

-최승호, <겨울 산> -



나는 모든 노동이 즐거워졌으면 좋겠다.

기름때와 땀으로 얼룩진 노동의

죽어서는 맛볼 수 없는 노동의 즐거움을

노동의 보람을 배웠으면 좋겠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전거와 함께

펑크 난 튜브와 낡은 페달과

살이 부러진 온갖 바퀴들과 불안한 핸들과 함께

해체된 쇠들의 무덤.


쇠들을 분해하고 결합하다 손가랍뼈는

게 같은 손가락뼈는 와르르 분해된다.

삐꺽거리며 낡아가는 뼈의 사슬,

나사가 부족한 영혼,

그리고 더러 제 손을 내려치는 나의 망치여,

나는 모든 노동이 즐거워졌으면 좋겠다.

- 최승호, <수리공> -



긴장한 고압선들 사이에

신호기가 서 있고

철도원이 깃발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떠밀리면서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저무는 광장

노란 줄이 선명한 아스팔트가 보이고

넓적하게 깔린 쥐가죽

그 위로 육중한 타이어들이 굴러갔다

붐비는 분주한 발걸음들

자빠질 듯 흔들리면서

수레에 실려가는 목각인형들

밤이 오고 긴장한

고압선들이 서로 얽혀드는 밤을 향하여

걸어가는 발걸음인 줄 알면서

성대한 장의행렬처럼 붐비는 사람들 속을 걷고 있었다

유령들처럼은

발자국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유령들처럼 정말 걷지 않겠노라 생각하면서

이끼 한 조각 없는 엷은 아스팔트 위를

- 최승호, <발걸음> -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 <북어> -



시간 속에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후드득 비를 맞는다

둔해 가던 감각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탯줄에 매달린

애처럼

애호박이 점점 살찌는 여름

물로 가득한 줄기들은

꿈틀거리며 태양을 향해 기어오르고


자라나며 굵어지던 등뼈 속에

점점 커지던 얼굴 속에

쭈글쭈글 시들던 꿈의 떡잎,

체념이

충동을 억누르며

글썽이는 땅 위에서

두꺼운 체념을 뚫고

충동이 화산처럼 불을 뿜지 못하는


마그마 같은 가슴,

가슴이 점점 식어 굳어가는 땅 위에서

결실도 없이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후드득 비를 맞는다

커다란 초조 속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 최승호, <여우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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