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먼 곳>에서

by 꿈강

문태준의 시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읽으면 된다. 오히려 설명이 시에의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다. '서정(抒情)'이라는 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이것도 설명이긴 하다…….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 문태준, <빈집> -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왕성해지는

산 그림자의 내면을 나비가 폴락폴락 날고 있습니다

얇고 하얀 낱장을 넘깁니다

산은 창문 너비의 검은 커튼을 치고

나비는 쪽창 같은 하얀 깨꽃에 날개를 세워 접고 앉고

눈초리에

시린

모색(暮色)

- 문태준, <산 그림자와 나비> -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客地)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 문태준, <망인(亡人)> -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 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 곳에 앉아 있다

손을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을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 문태준, <먼 곳> -



창호에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나는 바람에 떨리는 너의 잎사귀를 읽는다

이처럼 면(面)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 오래 곁에 있으니 우묵하거나 불룩하다

엎어질 듯이 서두르거나 망설이는 때가 있다

들추는데 냄새, 소리, 맛이 단순하지 않다

이리저리 위와 아래로 흔들리지만

깊거나 두껍거나 슬프거나 높거나 멀고 멀다

- 문태준, <정야(靜夜)> -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 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 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몇 해가 되고……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 문태준, <바위> -



모스크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 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나가 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 문태준, <꽃들> -



그때는 가지꽃 꽃그늘이 하나 엷게 생겨난 줄로만 알았지요

그때 나는 보라색 가지꽃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했으나

새의 울음이 나뭇가지 위에서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것만을 보았지요

당신은 내 등뒤를 지나서 갔으나

당신의 발자국이 바닥을 지그시 누르는 것만을 느꼈었지요

그때 나는 참깨꽃 져내린 하얀 자리를 굽어보고 있었지요

이제 겨우 이별을 알아서

그때 내 앉았던 그곳이 당신과의 갈림길이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 문태준, <나는 이제 이별을 알아서> -



울퉁불퉁한 가을 모과 하나를 보았지요

내가 꼭 모과 같았지요

나는 보자기를 풀듯

울퉁불퉁한 모과를 풀어보았지요

시큼하고 떫고 단

모과 향기

볕과 바람과 서리와 달빛의

조각 향기

볕은 둥글고

바람은 모나고

서리는 조급하고

달빛은 냉정하고

이 천들을 잇대서 짠

보자기 모과

외양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는 모과를 쥐고

뛰는 심장 가까이 대보았지요

울퉁불통하게 뛰는 심장 소리는

모과를 꼭 빼닮았더군요

- 문태준, <가을 모과> -



하루는 여름 속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건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생각이 많아진 하늘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늘어서서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넓고 먼 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사해하면서


빗방울이 굵어지고, 하얀 이마와 앞자락이 젖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들 속에 좀더 서 있어 보았다


누군가 다시 걸음을 떼 완성된 정물(靜物)을 좀 전의 대기 속에 두고 떠나기 전까지는

- 문태준, <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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