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은 김수영 시인과 함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 시인이라 불린다. 김수영 시인은 신동엽 시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신동엽의 걸작에는 우리가 오늘날 참여시에서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강인한 참여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 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
<신동엽 전집>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시 몇 편을 골라 보았다. 나직나직이 읽어 보자. 어떤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도 있다.
향(香)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돌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香)아 회올리는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 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香)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 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 신동엽, <향아>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돌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신동엽, <산에 언덕에>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런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를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버리겠지.
- 신동엽, <봄은>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 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 새끼 사람 새끼 곰 새끼 노루 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 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도 돌데.
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
물방개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때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을 내던져 버리데.
꽃 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히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 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 신동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신동엽, <산문시 1>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 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나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
-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을>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누르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 나섰다.
없었다.
바깥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 신동엽, <서사시 금강 서시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