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김선우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by 꿈강

김선우 시인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 대한 시평을 먼저 읽고 시를 읽는 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시평을 소개한다.


이 시집은 우주적 아날로지(analogy)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여성성의 여리고 물기 많은 언어는 잉태하고 포옹하고 사랑하면서 세상 모든 사물들이 넘나들며 서로의 기원을 이루는 삶을 보여준다. 시 속의 그 삶에는 리듬과 색깔과 촉감의 관능과 생명이 자연스럽게 넘쳐흐른다. 시적 자아는 우주의 온갖 사물 속으로 확산되고 우주의 만물은 거꾸로 시적 자아 속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시집 속의 시들은, 한편으로는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으로, 또 한편으로는 한 삶의 다른 삶 살아내기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한 연애시로, 다채롭게 읽힌다.


시평이 한눈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시를 읽고 난 다음, 시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괜찮다. 시를 읽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테니까. 문득, 훅하고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시를 만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1

그대가 아찔할 절벅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도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김선우, <낙화, 첫사랑> -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의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 김선우, <깨끗한 식사> -



무꾸라 했네 겨울밤 허리 길어 적막이 아니리로 울 넘어오면

무꾸 주까? 엄마나 할머니가 추임새처럼 무꾸를 말하였네

실팍하게 제대로 언 겨울 속살 맛이라면 그 후로도 동짓달 무꾸 맛이 오래 제일이었네


학교에 다니면서 무꾸는 무우가 되었네 무우도 퍽 괜찮았네

무우─라고 발음할 때 컴컴한 땅속에 스미듯 배는 흰빛

무우 밭에 나가 본 후 무우─ 땅속으로 번지는 흰 메아리처럼

실한 몸통에서 능청하게 빠져나온 뿌리 한 마디 무우가 제격이었네


무우라고 쓴 원고가 무가 되어 돌아왔네 표준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데,

무우─라고 슬쩍 뿌리를 내려놔야 '무'도 살 만한 거지

그래야 그 생것이 비 오는 날이면 우우우 스미는 빗물을 따라 잔뿌리 떨며 쏠리기도 한 흰 메아리인 줄 짐작이나 하지


무우 밭고랑 따라 저마다 둥그마한 흰 소 등 타고 가는 절집 한 채씩이라도 그렇잖은가

칠흑 같은 흙 속에 뚜벅뚜벅 박힌 희디흰 무우사(寺),

이쯤 되어야 메아리도 제 몸통을 타고 오지 않겠나

- 김선우, <나는 아무래도 무보다 무우가> -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 김선우, <꽃나무> -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는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내가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 라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요일

가난한 연인들이 되풀이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걸었고

쓰러져가는 담장의 뿌리를 환하게 적시며

용케도 피어난 파꽃들의 무덤을 보았고

변두리 야산 중턱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을 뿐

평생토록 한 곳에서 저렇게 흔들려도 좋겠구나,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위에서

생채기를 만들지 않고도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란 새가 퉁소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한 장난처럼

가끔씩 구름 조각을 옮겨다 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조을다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

너무 길지 않은, 너무 짧지도 않은

그 시간에 어떤 손들이 내 이마를 쓸고 지나간 걸까


십이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목젖 아래 깊은 항아리로부터

우주, 라는 말이 왜 떠올라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노랫소리와 구름 조각을 옮기던

새의 깃털 하나하나가 퉁소 구멍처럼 텅 비어

맑게 울리는 게 보였다

- 김선우, <퉁소> -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전봇대는 자라지 않는다 꽃 피우지 않는다 알을 낳고 어린 새끼를 기르지 않는다 자라지 않는 전봇대를 위해 자라나는 가로수를 해마다 절단한다 전깃줄 아래 웅크려 가로수는 해마다 스스로 가지를 친다 삐뚤고 굽은 무늬고 나무들 낭하로 기어간다 허리 아래 어디쯤 툭, 툭, 독하게 어린 새끼들을 내지르면서


가로 정비원들이 조경톱 자국을 만들어놓고 간 자리 플라타너스는 무혈(無血), 몸속에 무혈 혁명을 차곡차곡 쟁여 쌓는다 원주(圓柱) 밖으로 어린 새끼들을 내지르던 독한 슬픔이 흰 무명 끈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 아기들을 먼저 죽여 가지 끝에 새까맣게 매달아 놓고 전깃줄 아래 이 앙다문 나이테를 갈던 밤


바람이 분다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가는 죽은 아기들, 이빨 부딪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한 이파리 치욕도 잎 틔우지 않은 정결한 주검을 뿌리 뽑으러 내일이면 덤프트럭이 달려올 것이

- 김선우, <어미목(木)의 자살 3> -



큰 나무 가지들 눈을 얹고 저마다 어디론가 휘어져 있을 때

휘어지다 더러 부러지기도 할 때

어린 나무들

흰 병아리처럼 보송보송해진 발가락으로

오종종 눈밭을 콩콩 뛰어다니는 듯


예뻐라, 어떤 방향으로든

제 몸의 가지기 길이 되지 않은 몸들은

길이 없어 눈물이 깨끗한 햇몸들은

- 김선우, <눈 속에> -



목이 긴 사시나무 삭정이 하나가 몸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린 나는 맨발에 팬티가 젖는 줄도 모르고 돼지풀 독한 꽃가루처럼 여름빛과 놀고 있었다 엄마의 털뿌리 근처 땀샘에 매달려 내가 겨우겨우 이곳까지 올 동안 엄마의 호미질에 명아주가, 질경이가, 여뀌가, 배추 포기 바깥으로 뽑혀져 밭두둑에 버려졌다 나누기엔 너무 웃자란 슬픔들이 챙강거리는 햇빛 속에서 허리를 꺾곤 했다


삭정이 하나 주워 들고 당신의 옹이를 오래 들여다본다 당신의 중심에서 우는 배꼽, 오래 불린 쌀톨처럼 푸석해진 눈물이 켜켜이 달라붙어 있는 배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폭포 끝에서 망연하게 흔들리는 엄마, 왜 그렇게 높은 곳에서 엄마는 뛰어내려야 했을까 그때 엄마의 뱃속에는 푸른 싹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노란 배추 고갱이를 골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옛 밭두둑에서 흙장난하는 내가 보인다 명아주며 질경이며 여뀌 이러저러한 뜻 모를 풀이름에서 흐릿하게 풍겨오는 엄마의 젖 냄새…… 잡초 뿌리가 뽑혀져 밭둑에 던져지는 동안 배추 속이 왜 그렇게 노랗게 질려갔는지, 삭정이가 떨어져 내린 자리에 나무는 왜 다른 가지를 키울 수 없는지, 다그쳐 묻지 않아도 알아지는 저물녘이 오고


나는 이제 엄마에게 오래오래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마른 삭정이 하나 우연히 주워 들게 되는 저문 날, 깊고 환한 동굴 속의 상사뱀 따위나 생각하는 것이다 홀로 오래 사랑하다 죽으면 사랑하던 이의 배꼽 속에 들어가 산다는 상사뱀처럼, 나무옹이 속의 향그러운 뱀들과 엄마 배꼽 속의 초록빛 뱀이 아름다운 무늬로 엉기는 것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 살기에 당신의 배꼽이 너무 비좁지나 않을까, 즐거운 걱정이나 하면서.

- 김선우, <당신의 옹이> -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갯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춧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니고 살지 않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 김선우,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 -



항구에 막 닿은 '대양호'에서

여자가 제 키만 한 방어를 받아 내렸다

활처럼 몸을 담긴 등 푸른 아침 바다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물방울을 쏘아올리는 사이

환한 비린내,

여자의 아랫배를 지나 내 종아리까지 날아와 박힌

푸른 물방울 화살촉을 조심스레 뽑아 든다

손금 위에 얹힌 물방울 하나 속에서

수천의 방어 떼가 폭풍처럼 울고


오냐 오냐

여자가 큰 칼을 들어

방어의 은빛 아가미를 내리쳤다

오냐, 내가 너를 다시 낳으마.


여자가 등 푸른 물속으로 치마를 걷으며 들어간다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마리 은빛 방어들,

정오의 태양으로 헤엄쳐 간다

- 김선우, <대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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