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가재미>에서

by 꿈강

시집 <가재미>에 대한 평을 우선 소개한다. <가재미>의 시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터이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감상법으로 읽으면 더욱 좋다.


시집 <가재미>는 언어로 연주하는 피아노 독주곡을 듣는 듯 우리 의식을 맑게 구른다. 이 언어는 자모음으로 만들어진 낱말이 아닌 그 자체가 눈과 귀, 코, 혀 또는 촉각이어서 사물을 만지고 구부리고 조립하여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지어낸다. 그러나 그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진 시의 거울에 비친 감각의 세계이다. 놀라워라, '감각 없이는 세계가 없다'는 자명함과 똑같은 '감각 없이는 시가 없다'의 자명성! 시 안에 혼종교배하는 사물들, 감각들. 읽을 때마다 오감이 분주해진다.


앞서도 말했듯이 위의 평을 참고해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또한 좋다. <가재미>의 시를 만나러 가 보자.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며

내가 예전엔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 문태준, <사모(思慕) ─ 물의 안쪽> -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탄환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전속력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중심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 문태준, <바깥> -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문태준, <극빈> -



겨울 찬 하늘 한 켜 살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은 동천산(産)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 문태준, <서리> -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가장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마치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러워요 내 몸이 무러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오늘 봄이 다시 와 동백과 동백 진다고 우는 동박새가 한 자루요 동박새 우는 사이 흐르는 은하(銀河)와 멀리 와 흔들리는 바람이 한 자루요 바람의 지붕과 석류꽃 같은 꿈을 꾸는 내 아이가 한 자루요 이 끊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한 자루이오니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오니

- 문태준, <자루> -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 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 문태준, <길> -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문태준, <가재미> -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기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 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 문태준, <가재미 2> -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 문태준, <가재미 3 ---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



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의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 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 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 문태준, <강대나무를 노래함> -

*강대나무: 선 채로 말라죽은 나무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드득후드득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문태준, <바닥> -



밥맛이 싹 가셨다

나도 모르는 결에 내 생각의 밥그릇에 이상한 밥 냄새를 퍼담아 온 것이었다

다솔사 공양간을 돌아나갈 때 그 서늘한 밥 냄새

겨울밤 만해(卍海)도 동리(東里)도 언 잎에 싸락눈 치는 소리 듣다 한지처럼 정신이 맑아진 새벽녘 찬마루로 나섰다 비로소 한 공기씩 받아 허기를 달랬을 밥 냄새

다 걸러낸 오롯한 맨밥 냄새

다솔사 다녀온 후 모자처럼 내 생각에 얹어 다니는,

오래 그 속에 쪼그려 앉아 얼이 생겼으면 싶은, 아! 이 새벽에도 안 잊히는 밥 냄새!

밥 냄새 때문에 세끼 밥맛이 싹 가셨다

- 문태준, <그리운 밥 냄새> -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 -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 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

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

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게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

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

나무가 황금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연못 같더라

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고 가고 싶더라

- 문태준,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다

- 문태준, <꽃이 핀다> -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문태준, <시월에> -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문태준, <빈집의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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