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에서

by 꿈강

아 참 좋은 시들이다. 오랜만이다. 이, 깊은 내륙의 정서를 나는 뼛골의 시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싶다. 마치 뜨거운 뼛속에서 구워낸 시들만 같다. 읽고 나니 내 마음의 뼈들도 뜨끈하다.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특이하고 아름답다. 시가 낡디 낡은 언어의 품일망정 기성품을 거부하는 운명인 이상 때로 낡은 것은 많은 '새로움들' 위에서 새롭기 마련이다. 문태준의 시들이 따듯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새로운 낡음 때문이다.


장석남 시인이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고 쓴 시평이다. 장석남 시인의 말대로 이 시집에는 '아 참 좋은 시들'이 참 많다. 그중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시 몇 편을 골라보았다. 가만가만 읽어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터이다.



산죽(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렵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 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까지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 익은 산새 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문태준, <처서(處暑)> -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 문태준, <빈집 1> -

*흙더버기: 진흙이 튀어 올라 붙은 여러 개의 작은 진흙 방울.



반갑다 바지에 달겨드는 까치발 풀섶 지나 꿩 비탈 모양으로 날으는 산을 오르다 떼거리 왕벌에 놀라 가던 길 내려옵니다 여름내 무성하던 파란 이파리를 질겁하며 떨군 숲, 늑골에 찬 슬픔으로 골짜기는 응달 깊고, 늦은 오후까지 철길 위 서면 오락가락하는 기차처럼 마음 둘 데 없습니다 마귀의 손을 세운 십 년생 포도나무 그 밑 마른 고춧대로 앉아 있다, 생솔가지 꺾어 끌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당 어귀 삼재 든 석류나무는 가시가시 날카롭고 이 계절에 더 남겨지는 것 있을까 전정가위 들어 낮은 울타리 자릅니다 파란 피 흘리며 오래고 오래 지켜온 것들 떨어져 내립니다

- 문태준, <사철나무> -



제비집인데 제비 아닌 뭔 날것 돌아온다

찬물 위 기름 돌 듯 매번 처마 아래 그 집 허물 생각

그을린 방구들 구름들 서쪽으로 갈아 내놓는 인부들

집터 한 귀퉁이에 엉켜 살던 푸른 풀배암이

가시덤불 우거진 산속으로 소낙비처럼 내쳐간다

병 깊어져 오늘 산속으로 간 사람의 무정함

묻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저녁녘 중얼거리는

날벌레 떼거리, 저 살아 있는 무덤들!

나는 피우려던 쑥불 그만둔다

뜸부기는 별 하나씩 골짜기에 따 담아

하늘의 벌판에서 꽃들 별똥으로 지는데

하현달에 올라 낫을 갈며 나는 끊어지는 인연을 본다

- 문태준, <하짓날> -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철사줄을 감아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낸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 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 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야 죽음 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을엔 나무란 나무가 죄다 포도나무, 늙은 생애들뿐이다

- 문태준, <포도나무들> -



밭에서 캐낸 포도나무를 끌고 군불의 저녁으로 돌아갑니다


극형(極刑)의 울음을 익힌 갈까마귀 떼 나무들에게 내려앉고


나의 눈은 불을 켜고도 희미한 동력경운기의 길


깊어지면 병을 얻는 줄 압니다


사투리의 삶들 갈라 터져 별이 됩니다


고통도 먼발치에선 별인데


나는 나무의 피질이 등에 박히는 구릉에 삽니다

- 문태준, <구릉지대> -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

- 문태준, <엽서> -



자빠름하게 비탈져 서 있는 겨울 개암나무여

그 곁에서 나는 속 빈 호두 껍질입니다

새와 구름이 없고

허허로운 낮달 공중에서 허공으로 사립 밀고 가는데

지상에서 이 나무의 집은 왜 공터가 아닙니까

큰 고목의 둥치, 이랑져도 묵묵부답하는 뿌리들이여

그대 가까이 닿고자 하면,

쌓였다 녹고 녹았다 어는 진창의 산길

나는 한참 올라야겠습니다

- 문태준, <고목(枯木)의 힘> -



지주목에 쓸 요량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이 지난 세월을 메치는 소리

쿵, 쿵 귀가 멍멍하다

지게에 쟁여진 나무들은 아직 맥박이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

너무 용쓰느라 죽는 줄, 썩어질 줄 몰랐겠지만

나무 피질에 웅숭깊은 골, 하늘로 올라갔구나

- 문태준, <집착에 관하여> -



제깐엔 가마니 같은 문을 뜨고도 성에 안 차

하는 족족 늦둥이 애한테 통박이다

마수걸이에 호되게 구시렁거리는 아범이다

봄 햇살에 내놓자 바구미들이 구탱이로 몰렸다

겨울 한철에 정미소 기둥이 한쪽 내려앉았다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나 반 썩어질 양

정미소가 제 폼을 찾으려면 먼 데서 여럿 와야 할 모양이다

바구미 등처럼 까맣게 빛나는 봄날 오후의 하리(下里) 정미소

- 문태준, <하리(下里) 정미소> -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 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곡(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것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 문태준, <호두나무와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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