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시집 <껌>에서
김기택 시에서 풍경은 눈에 그냥 보이지 않는다. 몸이 거기 찔리거나 눌려야, 보인다. 시인은 언제나 보는 자[見者]였지만, 그냥 잘 보는 자는 아니었다. 먼저 풍경에 부딪치고 찔려야, 풍경은 보인다. 그러므로 견자 이전에 피견자(被見者)로서의 시인이 있다. 피견의 두려움이 견자의 평정에 이르는 과정은 경이롭다.
생명과 기계들은 폭력의 소용돌이에서 빙빙 돌면서, 그 폭력에 붙어먹거나 붙어 먹힌다. 김기택의 아주 조용한 언어는 시적 고행으로 얻어진 힘으로 이 악다구니를 기록한다. 그런데 폭력의 접촉면에서도 희생자들은 소외된다고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폭력 한가운데서 기면서, 거기 짓이겨지면서도, 몸은 그걸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우뚱거리는 몸 안으로 환한 빛과 음악이 기적같이 흘러들어올 때도 있다.
말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고 세상의 의미를 상징하지도 않는다. 풍경 하나 안에서 머물며, 그 안을 최대한 확장할 뿐이다. 꽉 막힌 듯했던 풍경이 펑펑 열리면서, 독보적인 명징(明澄)이 얻어진다. 격렬한 폭력과 상처는 선명하게 아로새겨지고, 시끄러운 아우성들은 말도 못 하게 고요한 맑음을 얻는다.
김진석 문학평론가의 시평이다. 이 시평을 길라잡이 삼아 김기택의 시를 읽어도 좋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또한 좋다. 자기 마음을 울리는 시 한 편을 만난다면 그 아니 좋으랴. 김기택의 시를 만나 보자.
덤프트럭 앞에서 짐자전거가 앞만 보며 달린다
갓길 없는 좁은 이차선 도로
아무리 빠르게 페달을 밟아도
느릿느릿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
사자 아가리 같은 경적이 쩌렁쩌렁 울며 뒷바퀴를 물어도
헛바퀴만 돌리며
아직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전거
자전거를 삼킬 듯 트럭은 꽁무니에 붙어서 오고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 줄에 달고 가듯 바퀴는 한적하고
발과 페달은 자전거 바퀴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 김기택,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 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 작구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 김기택, <껌> -
한 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죽으면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는 걸 몰랐기에 제 힘과 독기를 모두 모아 거친 물굽이처럼 요동쳤다.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엔 눈과 팔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방향도 없이 앞으로만 기어가다 저희들끼리 마구 엉켰다.
흰 접시는 마치 제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라미 안에서 빨판들을 물방울처럼 튀기며 거칠게 파도쳤다. 그러나 죽음이 달아나기엔 접시의 반경이 너무 짧았고 모든 길은 오직 우스꽝스러운 꿈틀거림으로만 열려 있었다. 토막 난 다리와 빨판들은 한 마리의 통일된 죽음이기를 포기하고 한 도막 한 도막이 독립된 삶이 되어 접시 밖으로 무작정 나가려 했고, 씹는 이빨 틈에 치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씹을 때마다 용수철처럼 경쾌하게 이빨을 튕겨내는 탄력.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은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 이루고 있는 탄력. 한 번에 다 죽지 않고 여러 번 촘촘하게 나누어진 죽음의 푹신푹신한 탄력. 다 짓이겨지고 나도 꿈틀거림의 울림이 여전히 턱관절에 남아 있는 탄력. 목 없고 눈 없고 손 없는 죽음이 터무니없이 억울할수록 이빨을 더욱 쫄깃쫄깃한 탄력을 받고 있었다.
- 김기택, <산낙지 먹기> -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버스는 온몸에서 진저리치는 소리를 냈다.
구슬픈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만 달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앞차와 부딪칠까봐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다 했다.
옆걸음으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게 되어 있는
동그란 다리,
속도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다리를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출발하면
옆 차선 대가리를 들이대고 팍팍 끼어들면서
버스는 사납게 내달렸다.
기세등등한 엔진 소리 사이로
숨어 우는 듯한 아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버스 앞유리는
깨질 것 같은 눈물이 가득한 눈
잠자리 눈처럼 얼굴을 다 가린 커다란 눈
눈꺼풀이 없어 감을 수도 없는 눈을 뜨고 있었다.
- 김기택, <버스> -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웃음을 당장 패대기칠 수도 있었지만
슬픔은 그가 더 호탕하게 웃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잘대는 주둥이 깊숙이 주먹 같은 울음을 처박을 수도 있었지만
침이 즐겁게 튀는 말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웃음과 수다에 맞추어 목과 이마의 핏줄이 굵어질 때마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게 보였다.
웃다가 조금이라도 표정이 일그러지면
아무리 환하게 웃어도 좀처럼 다시 펴지지 않았고
웃음이 고음으로 가다가 조금이라도 떨리면
기다렸다는 듯 즉시 울음소리로 바뀌려 하였다.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슬픔이 들킬까 봐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었다.
웃음과 수다가 갑자기 그칠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 김기택, <슬픈 얼굴> -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어둠.
핏줄이 뻗어 있는 붉은 벽.
느릿느릿 무늬가 움직이는 물렁물렁한 벽.
눈꺼풀이 닫혔는데도
눈은 계속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나는 피곤해서 잠깐 쉬려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데
어둠이건 흐릿한 것이건
눈은 닥치는 대로 초점을 맞추려 한다.
어둠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둠이 보이지 않는 어둠.
눈꺼풀을 닫으면 나타나는
온갖 색깔들과 형태들과 움직임들.
어젯밤 자는 동안에도
눈이 끊임없이 꿈을 쳐다보고 있는 통에
자고 나서도 머리가 무거웠다.
눈은
닫힌 눈꺼풀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 김기택, <눈> -
회색 양말을 신고 나갔다가 집에 와 벗을 때 보니
색깔이 비슷한 짝짝이 양말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비슷하면 무조건 똑같이 읽어버리는 눈.
작은 차이를 일일이 다 헤아려보는 것이 귀찮아
웬만한 것은 모두 하나로 묶어버리는 눈.
무차별하게 뭉뚱그려지는
숫자들 글자들 사람들 풍경들 앞에서
주름으로 웃는 눈.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이젠 아무래도 좋단 말인가.
빨래바구니에 처박히자마자
저마다 다른 발 모양과 색깔과 무늬와 질감을 버리고
빨랫감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양말들.
- 김기택, <회색 양말> -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로 넘을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 새 없이 뽑혀져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나온다.
거칠 것 없이 뽑혀져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
논과 밭, 나무들이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
산과 부딪치면 산이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절벽이 가로막으면 밑으로 가차 없이 기다란 구멍이 뚫린다.
뽑혀져나온 길이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 바퀴를 맹렬하게 굴린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바퀴는 맹렬하게 굴러서
바람이 전기톱으로 베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처럼 얇고 넓적하게 잘린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눈을 후벼 파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올챙이 다리 달리듯 가로수와 전봇대와 건물에 시간이 돋아난다.
풍경은 속도와 반죽되어 윤곽이 지워지면 흐려지고
시간은 엿처럼 쩍쩍 늘어지며 창밖으로 지나간다.
- 김기택, <고속도로> -
철제 막대에 끈으로 묶여 파닥거리는 바람. 얇은 천막의 두께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갑자기 고래 뱃속처럼 불룩해지는 천막의 두께. 요동치는 지느러미. 울 안에서 일제히 일어나는 비늘. 천막 속으로 잘못 들어와 날뛰는, 왜 날뛰는지 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날뛰는 바람.
바람이 들어가지 않아 직선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시멘트 벽. 바람을 기웃거리는 유리창. 흔들림, 유리창이 직선으로 휘어지는, 직선으로만 너덜거리고 펄럭거리는 완고한 방식. 유리창을 들여다보다 구름과 함께 휘어지는 맞은편 건물들. 건물이 잠깐 입 벌리는 사이, 건물 뱃속에 삼켜져 있다가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
시멘트 벽에 매달려 출렁거리는 천막. 물결치는 천막 밑은 깊은 수면. 얇은 껍데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물결의 깊이. 천에서 올올이 풀리려고, 풀려서 머리카락처럼 마구 헝클어지려고, 헝클어져서 아무데나 마구 흐트러지려고 뒤틀리며 용쓰는 바람. 풀려 날아가려는 날실과 씨실을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천막.
천막 속에서 파닥거리다가 풀려나오자마자 시멘트 벽에 부딪혀 주르르 흘러내리는 바람.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이는 바람. 무뚝뚝한 사각 속으로 스며들어 굳어가고 있는 바람. 땅에 굳게 박힌 채 서 있는 우람한 바람.
- 김기택, <감정 사치> -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막대기 같은
길고 좁은 틈이 있다.
길들, 푸른 나무들, 움직이는 것들은
그 투명한 막대기 속에 있디.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줌마들 웃음소리, 엔진 소리도
그 대롱 속에서 회오리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먼 산의 고요한 능선은 연필심처럼 짧아
언제나 직선이다.
아침이 되면
막대기에 형광등같이 희고 기다란 빛이 들어온다.
어둠도 눈도 비도 바람도
곧고 좁은 수직선 안에 끼여서 온다.
가끔 검은 막대기 끝에서 볕이 뜨기도 한다.
- 김기택, <막대기 속의 풍경> -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산에 가득하였다.
큰비가 올 것 같아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았다.
한참 지나도 비는 오지 않고
빗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렸다,
귀를 한껏 열어 소리를 따라가보니
빗소리가 나는 곳은 바람 속이었다.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치는 나뭇잎들이었다.
그 많은 잎들을 다 붙잡고 어쩔 줄 몰라
마구 흔들리기만 하는 가지들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올라 곧 토할 것 같은 내 허파였다.
소리는 그냥 쏟아져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숲을 통째로 들어올릴 듯 뒤흔들기도 하고
점점이 흩어져 날리기도 하였다.
빗소리에 맞아 나무 근육들 꿈틀거렸고
뿌리들은 땅 위로 기어 나와 들썩거렸고
잎들은 하얗게 뒤집혀 버둥거렸고
땅은 콧김을 뿜어댔고
내 입에서는 비린내가 덩어리처럼 확확 뽑혀나왔다.
산꼭대기에 이르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내 몸은 휘몰아친 비로 흠뻑 젖어 있었다.
- 김기택, <빗소리> -
살갗 밑으로 푸른 뿌리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목에서 이마로
가지 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거죽 밖으로 나오려는 굵은 뿌리를
살가죽이 간신히 누르며 덮은 곳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알도 붉은 잔뿌리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살도 오래된 땅이라는 듯
비바람에 파이고 그 주름 고랑으로 땀 흘러내기로
그 위로 들풀 같은 털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살은 안에 감추고
거죽은 황야처럼 한껏 질겨지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발바닥을 부드럽게 받았다가 밀어내는 흙길처럼
손바닥 닿는 자리에 두툼한 주름살이 만져집니다.
쭈글쭈글하다는 건
살가죽과 속살 사이에 팽팽하던 공기가 빠지고
그 자라에 허공이 가득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 김기택, <오래된 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