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이, 존댓말, 서열이 명확한 사회다 보니 ‘친구’라고 하면 대개 동갑이나 또래를 가리킨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키즈 카페에 가면 “여기 친구 있네, 같이 놀아”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그때의 ‘친구’란 사실 그냥 같은 또래 아이일 뿐, 깊은 정서적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친구’는 조금 달랐다. 나는 친구와 지인을 분명히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친구란 오랜 시간 곁에 두고 믿음을 주고 받은 사람, 내 마음을 충분히 나누며 서로를 위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단순한 안부를 묻는 사이, 학교나 직장에서 만난 동료는 ‘지인’ 일뿐이었다. 낯가림은 없는 편이라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알고 지내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내가 앤디와는 유독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돌이켜봐도 참 신기하다. 보는 순간 불꽃이 튀었던 서로를 향한 호감 덕분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와는 조금 다른 앤디의 성향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앤디의 ‘친구’에는 경계가 없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눈을 가졌고, 그 덕분에 스쳐가는 인연조차 친구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어느 날 앤디가 호주에 오게 된 사연을 들려주며 말했다.
“내 친구 매리가 날 호주로 초대했거든.”
나는 당연히 매리가 앤디의 또래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매리는 60대의 호주인 할머니였다. 앤디는 헝가리의 어느 선물가게에서 물건을 사다 우연히 그녀를 만났고,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 되어 둘은 친구가 되었다. 뜻밖의 만남은 매리의 초대로 이어졌고, 앤디는 기꺼이 그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찾아간 호주는 결국 그녀가 그곳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생의 전환점으로 이어졌다.
‘그냥 아는 사람’과 ‘스쳐가는 인연’을 친구로 만드는 앤디의 재주는 일상에서도 드러났다. 우리의 옆집에는 캐나다에서 온 70대 노인 닉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덩치가 큰 그는 늘 맨발로 마당을 활보했고,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어 나에겐 조금 무서운 존재였다. 나는 닉 아저씨를 마주칠 때마다 “Hi...”라는 인사만 겨우 건네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앤디는 달랐다. 종종 닉 아저씨와 대화를 하고, 음식을 만들면 나누기도 하면서 금세 ‘이웃사촌’ 같은 사이가 되었다. 급하게 차가 필요할 때는 아저씨에게 부탁해 차를 빌리기도 했는데, 그는 언제나 흔쾌히 자신의 차를 내어주곤 했다. 무서운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편견과는 달리 그는 꽤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친구를 만든다’는 게 꼭 나처럼 오랜 시간과 신뢰 쌓기만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를 만드는 앤디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 덕분에 앤디에게는 20대부터 70대까지,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앤디에게 물었다.
“앤디, 너한테 친구란 뭐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진정한 친구란 곁에 있어주고, 도움을 주고받고, 감정과 경험을 쌓으며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난 그게 친구라고 생각해.”
그녀의 말처럼, 곁에서 함께 지내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그게 바로 친구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친구란 이름에 괜한 벽을 세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싶다.
나이가 서른 후반쯤 되니 곁에 남아 있는 친구가 많지 않다.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내가 떠나기도 했고, 친구가 나를 떠나간 경우도 있다. 오히려 더 어렸을 때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참아내서, 혹은 누군가가 날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을 곁에 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포용력은 줄고 단호함만 세져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과감히 잘라내 버렸다. 그 결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날이 갈수록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낀다. 내가 부족하고 못날 때에도 받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 삶의 궤적이 달라져 각자 다른 길을 가더라도 여전히 응원해 주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삶은 더 풍부해졌고, 위로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실 ‘친구’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나를 지켜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니라 마음이다. 내 곁에 머물러 주고, 내 삶을 응원해 준 이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아껴주는 것. 결국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