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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해서 미안해

by 인생 탐험가

살면서 가족 외의 사람과 함께 살아본 적 없는 나에게 국적까지 다른 타인과 한 집에 사는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각자의 삶의 방식을 맞춰가는 것이 특히 중요했는데, 가끔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설거지. 앤디는 싱크대에 물을 가득 받아 세제를 풀고 그릇을 문질문질 한 뒤, 마지막엔 흐르는 물에 슥- 하고 헹구고 마무리를 한다. 반대로 나는 세제 거품이 묻은 그릇을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헹궈내야만 한다. 앤디의 방식은 세제 찌꺼기가 남지 않을까 싶어 내 맘에 들지 않는데, 반대로 앤디는 내 방식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 제발 물 좀 아껴! 그렇게 수도꼭지 틀어놓고 물을 쓰는 건 엄청난 낭비라고!”

앤디의 잔소리에 나는 싱크대에 물을 받아놓고 설거지를 해보기도 했지만, 이 방식은 만족할 만큼 청결하진 않은 것 같아서 결국 나는 원래의 내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와 한 집에 살면서 조심해야 할 또 하나는 각자 ‘니 거 내 거’의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성된 음식은 나눠먹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서로의 식재료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계란 하나, 빵 한 조각, 양파 한 개같이 작고 사소한 것들은 상대의 허락을 구한 후 이용했는데, 가끔은 이 작은 식재료로 인해 치사해지고 기분이 상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계획해 둔 것이 틀어질 때’에 발생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늦은 밤, 출출할 때 하나 남았던 라면을 기억해 내곤 찬장을 열었는데 라면이 없다거나, 볶음밥 위에 얹으려고 남겨둔 계란 하나가 어딘가 사라지고 없을 때. 이런 것들은 사소하지만 순간적인 짜증을 유발한다. 이럴 때면, 난 앤디에게 가서 부탁을 했다.

“앤디, 내 식료품들 먹고 사용해도 돼. 다만, 먹을 땐 제발 말은 해 줘...”

앤디는 알겠다고 했으나 가끔은 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치사한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포도 사건이다.


자취생에게 과일은 사치이다. 배를 채울 만큼 든든하지도 않으면서 가격은 비싸기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껏해야 사과나 바나나 정도나 사 먹던 어느 날, 나는 무려 한 송이에 만 원이나 하는 커다란 청포도를 사 왔다. 식사용도 아닌 것을 한 송이에 만 원이나 주고 샀으니 그 얼마나 사치란 말인가. 나의 이 호사스러운 과일을 한 번에 다 먹어치울 순 없어 나는 것을 조금씩 아껴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몇 알씩 떼어내어 디저트처럼 음미했다.

며칠 후, 포도를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앙상한 뼈대만이 남은 나의 포도송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마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보이던 그 푸르고 탱글한 포도의 유혹을 앤디가 차마 뿌리치지 못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데, 그때는 그 앙상한 포도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최대한 화난 티를 내지 않으며 다시 한번 앤디에게 이야기했다.

“앤디, 혹시 내 포도... 네가 먹었어?”

앤디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냥 한두 알 맛본다는 게 그만... 먹다 보니 꽤 많이 먹어버렸네.”

고작 포도 한 송이를 두고, 마치 ‘내 샤넬 백 몰래 들었니?’와 같은 대화를 해야 하다니. 어찌 보면 참 씁쓸한 일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앤디도 실직을 한 터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고, 나 역시 매달 제한된 생활비로만 지내야 하던 때라 만 원짜리 포도가 우리에겐 사치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활발히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앤디, 너 포도 좋아하는구나!’라고 하며 포도 한 박스를 사 와서 함께 나눠 먹었을 텐데. 이제와 돌아보니 그때 앤디에게 왜 몰래 포도를 먹었냐며 한 마디를 한 것이 참 미안해진다. 앤디가 언젠가 이 글을 볼 일이 있으려나. 혹시라도 그녀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한 마디 꼭 전해주고 싶다.


앤디, 다음번엔 네가 좋아하는 각종 과일을 사서 대접할게. 우리 배가 터질 때까지 과일 파티 하자! 내가 너무 치사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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