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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찾아서

by 인생 탐험가


나는 어려서부터 규칙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고, 하라는 것도 곧 잘 따랐다. 중고등학생 시절 많이들 줄여 입는 교복도 단 한 번도 고쳐 입은 적이 없었고, 노는 학생이 아니어도 한 번쯤 경험한다는 음주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규칙이 답답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규칙은 일종의 안전장치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나를 불안정한 것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요소로 여겨졌다.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이다 보니, 통념상 해야만 하는 나이대별 역할 행동에도 충실한 편이었다. 학생 때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대학에 가선 취업을 위해, 취업 이후엔 보다 나은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정해진 것들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남들이 하는 것’은 나 역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모두가 가는 길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그 길 한가운데에 서 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20-30대에 직장 생활로 모은 돈으로 결혼을 준비할 법한 나이에, 나는 다른 나라로 떠나서는 해변에 누워 있는 데에 그 돈을 모조리 써버렸다. 규칙, 통념, 의무를 충실히 따르던 사람이 갑자기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포기하고 홀연히 다른 나라로 가서 무턱대고 살아보겠다고 한 것은 일종의 비행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쉽지 않은 결심이자 비행처럼 보였던 나의 타지 생활은 의외로 손쉽게 결정되었고, 그 결정은 ‘비행(非行)’이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비행(飛行)’의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숙원사업과도 같았던 영어공부도 할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을 만나 돈 주고 살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쌓았다. 평생을 스스로가 개미인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내가 개미의 탈을 쓴 베짱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맘 편히 늘어져 휴식하는 삶을 살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잠옷을 입고 기타 줄을 튕기거나, 대충 아무렇게나 걸치고 해변으로 나가 일광욕을 즐기며 말이다.


새로운 삶에 취해있는 사이에 시간은 훌쩍 지났고, 1년짜리 비자는 만료일을 앞두고 있었다. 비자는 끝나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은 다가오는데, 사실 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고,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평생을 ‘남들이 하는 것들’과 ‘해야만 하는 것들’을 따르며 진짜 원하는 것은 흐려진 삶 속에 놓여있었다. 모두가 서 있는 길에서 벗어나면 그대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없는 낯선 길 한가운데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남들과 다른 길에 서 있어도 그 길은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낙오가 아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나는 쉽게 얼굴을 내밀지 않던 내 안의 진짜 욕망을 조심스레 들춰보았다.

“좋은 옷과 가방을 걸치고 매일같이 지하철과 버스에 끼어 있기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해변에 누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

나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용기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비자를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돈도 없었고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에는 ‘해야만 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해 오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 나의 ‘진짜 욕망’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살면서 이토록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그즈음, 나는 사고 싶은 비키니 수영복이 있었다. 고작 25불, 한국 돈으로 2만 원 남짓 하는 그것을 두고 나는 며칠을 살까 말까 고민을 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구매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자를 새롭게 신청하고 나서는 바로 매장에 가서 비키니를 구매했다. 그리고 앤디에게 함께 일광욕을 가자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 완전히 현지인 같아.”

새 수영복을 입은 나를 보며 앤디가 말을 건넸다.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해변에 나란히 누워 뜨거운 볕을 쬐었다. 이젠 내 피부색도 제법 그녀와 비슷하게 커피색 쿠키처럼 구워져 있었다. 비자, 체류 연장, 심지어는 고민하다가 구매한 수영복까지. 일상의 고민을 털어놓는 나에게 그녀는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냈고, 나는 ‘역시 그러길 잘했다’ 며 안도했다.

나는 어느새 이곳의 공기와 빛, 삶의 속도에 온전히 동화되고 있었다. 평생을 ‘해야 하는 삶’ 속에 묶여있던 내가 ‘하고 싶은 삶’을 찾아냈다.

나는 모래 위에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낮잠을 청했다. 불어오는 짠 바닷바람에 내 마음이 기분 좋게 일렁였다. 내 삶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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