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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도 외모도 다른 나의 가족

by 인생 탐험가


“지, 엄마가 돌아가셨어.”

어느 날 앤디에게서 문자가 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헝가리에 계시는 앤디의 어머니는 지병 없이 건강하셨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읽자마자 나는 앤디의 집으로 달려갔다. 무슨 사연인지는 직접 들어야 할 일이었다. 큰 충격에 앤디가 무너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도착한 집 안은 조용했다. 분명 눈물바다일 거라 생각했지만, 앤디는 멍한 표정으로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앤디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 믿기지가 않아서 눈물이 나지 않아...”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헝가리에 있는 여동생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나라 전체가 봉쇄된 시기였기에, 앤디는 호주를 떠날 수도 없었다. 사고가 나기 불과 며칠 전, 앤디는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니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일상은 평온했다고 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 너무 울고 싶어.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가 않아.”

슬픔과 충격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지만, 현실감이 없는 소식에 감정의 배출구가 막혀 버렸다. 앤디는 그저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녀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를 안아주는 것만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앤디는 감정의 둑을 터뜨리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기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고사였기 때문에 변호사와 끊임없이 연락을 해야 했고, 장례 절차 등 현실적인 일들이 그녀 앞에 쌓여 있었다. 여동생은 어린 아들 둘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앤디는 이따금씩 무너져 내리는 여동생을 다독이며, 법적 문제와 장례비를 해결해 나갔다. 결국 앤디는 먼 타지에서 어머니를 기렸다. 어머니를 곁에서 직접 보내드리지 못해서인 걸까. 모든 것이 그녀에겐 여전히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며칠이고 악몽 속에 사는 듯 마음만이 괴로울 뿐이었다.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도 무거웠다. 앤디가 이성의 힘으로 삶의 균형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슬픔에 잠식되지 않으려 애썼다. 집은 여전히 정돈되어 있었고, 마음이 괴로울 때면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나를 만날 때면 예전처럼 웃어 보이려 했지만, 그 미소엔 생기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함께 해변을 걸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앤디의 얼굴에도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일상이 회복되자 오히려 어머니의 부재가 더 깊이 다가왔다. 어느 날, 함께 차를 마시던 앤디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모든 일이 조금 정리된 뒤에야, 어머니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나는 고아야.”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앤디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흐느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를 잃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뒤늦게 몰려온 슬픔에 눈물을 터뜨리는 앤디에게 나는 말해주었다.

“내가 같이 있어줄게. 난 너의 자매잖아.”

우리는 종종 농담처럼 “우리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야.”라고 말하곤 했다.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 맞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농담은 우리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표현이었다.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서 내가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나의 헝가리 자매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앤디가 가장 괴로운 이 시기에, 내가 그녀에게서 받았던 위로를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너는 나의 가족이야.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눈물을 닦으며 앤디가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위로의 존재가 될 수 있음에 다행이었다. 앤디는 나를 비롯하여, 그녀가 ‘호주에서 만난 새 가족’이라고 일컫는 친구들을 통해서 서서히 슬픔을 이겨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전은 ‘가족’을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하기에, 우리는 사전적 의미로는 절대 가족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즈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국적도, 생김새도, 식성도, 생활 습관도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나의 가족이라고. 우리는 어느새 그렇게 가족이 되어버렸다고.


우리는 바다를 찾았다.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겁게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도 모른 채, 바다는 그저 바람을 보내고 파도를 밀어냈다. 태연한 듯한 그 거대한 힘에 이끌려 그녀는 해변 길을 따라 천천히 발자국을 새겼다. 작은 발자국들이 우리를 따라 길게 이어져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이따금 우리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녀의 슬픔도 그 물결 속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새로운 발자국처럼 그녀의 삶에도 또 다른 행복과 기쁨이 새겨지기를, 나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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