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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Nov 20. 2023

<싱 스트리트>(2016)

동심

<싱 스트리트>(2016)에는 동심의 세계가 있다. 동심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동심(冬心): 겨울과도 같이 차갑고 쓸쓸한 마음.

    동심(同心): 마음을 같이함. 또는 같은 마음.

    동심(動心): 자극을 받아 마음이 움직임.

    동심(童心): 어린아이의 마음


동심(冬心): 겨울과도 같이 차갑고 쓸쓸한 마음.

 <싱 스트리트>의 시공간적 배경은 1985년의 아일랜드 더블린이다. 아일랜드의 20세기는 격동의 세기였다. 그때 아일랜드는 독립, 분단, 그리고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주인공 코너(페리다 월시-필로 분)의 집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해고 위기에 내몰리고 어머니의 수익은 변변치 않다. 형 브렌든(잭 레이너 분)은 백수이고 누나는 취업 준비생이므로 살림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코너는 사립학교를 떠나 싱스트리트의 미션스쿨로 전학을 간다. 학교의 첫인상은 난장판이다. 치고받고 싸우는 학생들, 술에 전 선생님은 안 그래도 뒤숭숭한 코너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한다.

 그러나 <싱 스트리트>는 코너의 성장담이다. 성장담의 주인공은 의지적 인간형이기 마련이다.


 코너가 의지적 인간형임을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전학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너는 교장을 만난다. 교장은 권위주의적이다. 그는 코너에게 교칙을 따라 검정 구두를 착용할 것을 강요한다. 다음날 코너는 교장실로 불려 간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갈색 구두를 신고 있다. 검정 구두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코너의 변명이다. 한 술 더 떠 코너는 머리에 브릿지를 넣고 진한 화장을 하고 있다. 그는 염색과 화장은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코너는 교장의 권위주의에 맞서고 있다. 사실 그가 엄마에게 검정 구두를 사 달라고 조르는 장면은 없었다.

 코너는 검정 구두를 신은 학생들 사이에서 갈색 구두를 신고 걷는다. 갈색은 코너의 색이다. 그것은 예민한 색이다. 흑인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인의 피부는 짙은 갈색이다. 흑안이라고 불리는 동양인의 눈동자도 그렇다. 그런데 갈색을 검은색이라고 부르는 분위기에서 갈색은 검은색이 되고 만다. 뚜렷한 주관만이 갈색을 갈색으로 있게 한다. <싱 스트리트>의 결말부에서 코너는 갈색 재킷을 입고, 갈색 가방을 메고, 갈색 구두를 신은 채 아일랜드를 떠난다. 영화의 OST <Brown Shoes>의 가사,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가 갈색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유야 어쨌든 코너는 교장의 눈엣가시일 것이다. 교장은 코너에게 양말만 신고 다닐 것을 명령한다. 학생들도 코너를 못살게 군다. 홍조 띤 코너의 볼이 추운 날씨를 짐작케 한다. 동심(冬心)이다.


동심(同心): 마음을 같이함. 또는 같은 마음.

 저체온증을 호소하는 사람을 맨몸으로 껴안아 체온을 유지하는 일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온기는 동심(冬心)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밴드 싱 스트리트는 코너가 라피나(루시 보인턴 분)에게 한 귀여운 거짓말에서 비롯된다. 작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코너와 작곡을 하는 에이먼(마크 맥케나 분)이 주축인 밴드는 어딘가 어설프다. 그러나 어설픔은 청춘의 단면이다. 그래서 싱 스트리트의 음악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음악과 현실이 항상 같지만은 않다. <싱 스트리트>의 OST <The Riddle Of The Model>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코너의 집은 그 분위기가 차갑고 무겁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선언한다. 아버지는 지금 사는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것이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합칠 것이다. 코너 삼 남매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피나도 코너를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런던에서 패션모델이 될 것이다.

 가족이 흩어지고 애인이 떠나는 비극은 어느 누구라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다. 코너는 음악을 방어 기제로 그 비극을 견뎌보려고 한다. 그는 집을 나와 에이먼을 찾아간다. 에이먼은 코너의 심상치 않은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는다. 코너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코너에게 눈앞의 비극은 불가해한 것들일 뿐이다. 삶은 불가해한 것이라는 명제는 사실이다. 그러나 코너는 그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리다. 코너에게 음악은 실낱 같은 희망이다. 삶은 불가해한 것이므로 마음대로는 안되더라도, 마음대로 살아볼 수는 있다. 밴드 싱 스트리트가 그 여정을 함께 한다. 동심(同心)이다.


동심(動心): 자극을 받아 마음이 움직임.

 앞서 말했듯, <싱 스트리트>는 소년의 성장담이다. 성장담에는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라피나는 코너의 조력자다. 그녀는 코너의 뮤즈다. 코너는 우연히 길에서 본 라피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음악을 시작했다. 사실 코너의 음악은 라피나를 위한 오드에 가깝다. 그래서 라피나는 코너의 음악의 시발점이고, 종착점이다. 코너가 라피나를 사랑하는 까닭은 거창하지 않다. 라피나의 눈동자는 구름이 걷힌 보름달 같았다. 코너는 그 눈동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라피나가 런던으로 떠나려고 한다. 20세기 격동의 아일랜드에서 수많은 청춘이 영국으로 떠나려고 했다. 사실 영국으로 떠난다고 한들 뾰족한 수는 없었으므로, 아일랜드에서 도피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다. 라피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희망의 불모지였던 아일랜드에서 희망의 씨앗이 싹튼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라피나는 런던에서 배신당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라피나의 눈동자는 구름이 걷힌 보름달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 위 검은 멍자국은 보름달에 낀 먹구름 같다.

 코너는 라피나와 재회한다. 밴드 싱 스트리트가 다시 활기를 띤다. 싱 스트리트는 새 음악의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바다로 간다. 코너는 라피나에게 바다로 뛰어드는 척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라피나는 바다에 그대로 뛰어든다. 놀란 코너가 라피나를 물 밖으로 건져낸다. 그는 왜 그랬냐고 묻고 라피나는 “우리 작품을 위해서”라고 답한다. “절대 적당히 해선 안 돼. 알아들었어?”라는 라피나의 말에 코너가 입을 맞춘다.

 관성inertia은 ‘움직임에 대한 저항’, ‘물체가 계속 정지해 있으려는 성질’ 등을 뜻하는 라틴어다. 그런데 그것은 게으름idleness, lazines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성적인 삶은 변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만족하는 게으른 삶일 것이다. 그 삶의 표어는 적당함이다. 물론 적당함의 미학이 있다. 안분지족 하는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만족하는 삶은 그렇지 않다. 변화를 바란다면 앞선 라피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싱 스트리트>의 OST <A Beautiful Sea>에서 코너는 “파도 아래의 그녀는 나를 흠뻑 빠져들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라피나의 세례를 받았다. 새로 태어난 코너가 “떠나자, 바람이 부는 곳으로 날 데려다줘. 먼 내일을 향해 항해하자. 뒤돌아 도시에 키스를 보내자”라고 노래한다. 이제 그는 떠날 것이다.


 형 브렌든도 코너의 조력자다. 존 카니 감독은 브렌든이라는 인물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브렌든을 “어린 시절 당신이 기억하는 쿨하면서도 올바른 그런 어른”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에게 자신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가진 어른은 믿고 따를 만할 것이다. 브렌든은 코너처럼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음악을 포기했고, 백수가 되어버렸다. 얼핏 브렌든은 아무 고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브렌든의 방 한 켠에 프로이트의 초상이 그의 내적 고통을 암시한다. 그것은 대부분 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느 날 브렌든이 코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넌 막내라 이 미친 가족한테 내가 투쟁해서 얻어낸 걸 거저 누리고 컸”다는 브렌든의 말이 장남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브렌든은 누구보다 코너를 사랑하고 코너의 꿈을 응원한다. 코너는 시시콜콜하게 묻고 브렌든은 퉁명스럽게 답한다. 코너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코너에게 풀리지 않는 실타래였던 사랑도 브렌든의 도움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코너는 한동안 “너의 문제는 슬픔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야. 하지만 사랑이란 바로 슬픔이야. 행복한 슬픔”이라는 라피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라피나는 행복한 슬픔이라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코너를 아이 취급했다. 라피나에게 어엿한 남자이고 싶었던 코너는 브렌든에게 도움을 구했다. 브렌든은 “글쎄, 내 생각에는 그녀가 한 말의 뜻은 너의 인생에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야. 너가 슬퍼도 괜찮을 장소 말이야”라고 말했다. 라피나에게 행복한 슬픔은 사랑이었지만 브렌든에게 그것은 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든 꿈이든 그 본질은 같다. 모래성 같은 것.

 모래성은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이 한 번 들어오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모래밭의 아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래성을 쌓는다. 물과 모래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용기가 아이의 축성築城을 부추기는 듯하다. 아이는 모래성을 다 쌓아 놓고 그곳에 자신의 세계를 건축한다. 그런데 한껏 감격에 겨운 아이 뒤로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은 아이의 모래성을 몇 번 만에 뭉그러뜨린다. 뭉그러진 모래성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진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다. 모래성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엄마의 말은 야속하게 들릴 뿐이다. 최선의 위로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아이는 다시 모래성을 쌓을 것이다. 첫 번째 모래성이 덧없이 사라졌더라도 모래장난의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래성의 본질은 행복한 슬픔이다. 아이는 그렇게 두 번째 모래성을 쌓고, 울었다가, 세 번째 모래성을 쌓을 것이다.


 브렌든의 도움으로 행복한 슬픔이라는 역설을 이해한 코너는 “슬퍼도 괜찮을 장소”로 떠나려고 한다. 그는 라피나를 데리고 브렌든을 찾아온다. 코너와 라피나의 종착지는 런던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코너의 데모 테이프와 라피나의 포트폴리오가 전부다. 브렌든은 부둣가까지 코너와 라피나를 배웅한다. 그는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코너와 라피나를 바라보고 쾌재를 부른다. 브렌든은 코너가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바람대로 코너가 출항했다. 브렌든도 더는 정박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음악을 시작하고 변화하는 코너를 보고 담배를 끊었다. “나도 너처럼 자극을 받아 변하려고”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동심(動心)이다.


동심(童心): 어린아이의 마음.

 조각배는 약간의 풍랑에도 심하게 흔들린다. 코너와 라피나가 출항한 그날 풍랑은 거셌다. 배가 흔들리고 코너와 라피나는 물을 뒤집어쓴다. 항해하다가 큰 유람선과 충돌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싱 스트리트>는 그 항해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코너와 라피나의 밝은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껏 코너와 라피나는 꿋꿋하게 성장했다.

 코너와 라피나는 내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큰 유람선의 승객들이 코너와 라피나를 응원한다. 조각배와 유람선은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싱 스트리트>의 시공간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유람선의 종착지도 런던이었을 것이다. 유람선은 안정과 이끌림이고, 조각배는 불안정과 이끌음이다. 유람선에서는 항해사만 배의 키를 잡을 수 있다. 숙련된 항해사는 안전한 항해를 보장한다. 그러나 유람선의 승객은 항해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한다. 조각배에서는 누구든 키를 잡을 수 있다. 숙련된 항해사는 없으므로 안전한 항해는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각배 위 어떤 사람은 스스로 항로를 정하고 항해할 수 있다.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존 카니 감독은 조각배의 항해를 응원하고 있다.

 조각배의 항해는 아이의 정신이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우리 정신이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가 된다고 말했다. 낙타는 짐을 지고 묵묵히 걷는다. 낙타의 정신은 사회, 종교 등 외적 가치에 순응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편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낙타의 정신은 아득해진다. 사자는 그간의 짐을 털어버리고 포효한다. 사자의 정신은 외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정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한 일이다. 사자의 정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한참 고민해야 한다. 아이는 마냥 즐거워한다. 아이의 정신은 긴 고민을 접어두고 유희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때로 낙타가 되기도, 사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아이는 쌓였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쌓이는 모래성에 괘념치 않고 모래장난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동심(童心)이다.  


 <싱 스트리트>의 OST <Go Now>는 꿈을 찾아 런던으로 떠난 코너를 향한 브렌든의 마지막 조언이다. “계속 가, 잘못돼도 내일의 너는 괜찮을 테니까”라는 가사가 우리를 동심(童心)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이제 “슬퍼도 괜찮을 장소”가 있는 골목 초입에 있다. “넌 절대 가지 않을 거야. 네가 지금 안 간다면”.  골목길 어귀에서 오래 어정거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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