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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Nov 15. 2023

<이리나 팜>(2007)

매춘부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이리나 팜>(2007)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아쉽게 수상은 하지 못했다. 대중의 평가는 양분되었다. 부정적인 쪽은 플롯을 비판했다. 오십이 넘은 할머니가 손자의 병원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소호의 매춘부가 된다는 플롯이 억지스럽다는 것이다. 그 비판에는 할머니가 매춘부가 되지 않고도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충분히 이성적이다. 매춘부가 된 할머니 매기(마리안느 페이스풀 분)의 손자 올리(코리 버크 분)에게는 아빠 톰(케빈 비숍 분)과 엄마 사라(쇼한 헬렛 분)가 있다. 그런데 <이리나 팜>은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려는 아빠와 엄마의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더라면 할머니는 매춘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리나 팜>의 주연은 매기와 그녀가 일하는 ‘섹시월드’의 포주 미키(미키 마뇰로비치 분)다. 아빠와 엄마는 조연일 뿐이다. 주연과 조연은 각자의 몫이 있다.


 매기는 평범한 할머니다. 남편은 죽었지만 다 큰 아들과 며느리가 있고, 금지옥엽 귀한 손자도 있다. 그런데 그 손자가 희귀병을 앓고 있다. 온 가족이 들러붙어 갖은 치료를 다해본 듯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여기저기 손도 벌려보고 집까지 팔았다. 그러나 병에 차도가 없다. 그래도 매기는 말한다. “할 수 있는 걸 다 안 해봤다면 우리 스스로를 용서 못 했을 거야.”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있다. 담당의는 호주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치료법이 있다고 말한다. 대뜸 며느리가 의사에게 비용을 묻는다. 매기는 그 답을 듣기도 전에 말한다. “언제 갈 수 있죠?” 치료는 무상이지만 부대 비용이 필요하다. 6천 파운드, 한화 천만 원 정도. 집도 절도 없는 가족에게 그 실낱같은 희망이 너덜거린다.


 매기는 돈을 구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들이 반박한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다. 먼저 매기는 은행에 찾아간다. 그러나 대출은 거절된다. 은행원의 말처럼 매기에게는 수입도, 저축도, 그리고 집도 없다. 다음으로 매기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구직도 거절된다. 직원의 말처럼 매기는 늙었다. 매기는 무작정 걷는다. 그러다 문득 어떤 가게 유리창에 붙은 구직 광고를 보게 된다. “호스티스 구함 최고 급료”. 마지막으로 매기는 섹시월드를 찾아간다. 그곳은 빨간 방이다. 매기는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직원은 “마지막 문이”라고 안내한다. 그곳에서 매기는 미키를 만난다.

 미키는 가죽 재킷을 입고 포마드 머리를 한 포주다. 그는 매기에게 호스티스라는 비유를 설명해 준다. 섹시월드에서 호스티스는 “카페나 바 따위의 술집에서 술 시중을 드는 여자”가 아니다. 호스티스는 매춘부다. 매기는 적잖이 당황한다. 미키도 마찬가지다. 매기는 늙었다. 그녀는 매춘부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기의 손은 부드러웠다. 미키는 매기에게 손님의 자위를 돕는 일을 제안한다. 일주일에 6백 파운드가 그 대가다. 매기는 6천 파운드를 구해야 했다. 그래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집에서도 매기는 손을 응시한다. 미키는 손 기술이 좋아지면 9백 파운드를 주겠다고도 말했다. 손자가 죽어간다. 어림잡아 두 달이면 끝날 일이다. 매기는 다시 섹시월드를 찾아간다. 일은 단순하다. 버튼을 누른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손님의 물건이 나온다. 그것을 쥐고 흔든다. 선배 루이사(돌카 그릴러스 분)가 시범을 보인다. 손님과 직원은 서로를 볼 수 없다. 벽 너머 손님의 신음과 루이사의 무표정이 충돌한다. 루이사의 시범이 끝나고 매기가 나선다. 그녀는 훌륭하게 해낸다.

 노동이 계속된다. 매기는 젖소의 젖을 짜듯 일한다. 선배 루이사와의 유대감도 생긴다. 급여가 계속 오른다. 매기의 손은 부드러웠다. 미키는 매기에게 이리나 팜Irina Palm이라는 가명을 붙여준다. 이리나의 손바닥. 이리나는 미키의 첫 여자였다. 매기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한다. 그녀는 "중년의 아낙네"다. 미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매기를 인정하고 있다. 매기는 이리나 팜이다.

 매기는 번 돈을 아들에게 준다. 그녀는 가불을 받았다. 노동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변화가 보인다. 매기는 벽에 액자를 걸고, 화병에 꽃을 담는다. 못 볼 꼴을 못 본 척하지도 않는다. 매기의 퇴근길에는 종종 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요란을 피웠다. 매기는 못 본 척 그 옆을 지나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앞에 선다. 매기에게 “페니스 엘보”가 생겼다. 페니스 엘보는 테니스 선수의 테니스 엘보와 비슷한 것이다. 미키는 왼손으로 일할 수 있냐고 묻는다. 매기는 왼손 약지에서 결혼반지를 뺀다. 매기는 이리나 팜이다.

 그런데 어느 날 루이사가 매기에게 불뚝 화를 낸다. 매기의 수요가 늘자 미키가 루이사를 해고한 것이다. 매기는 미키를 찾아가 따져 묻는다. 미키는 섹시월드는 사업이라고 답한다. 매기는 그 답에 좌절한다. 매기에게 자신의 노동은 단순한 사업의 일환 이상이었다. 매기는 그 길로 루이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루이사는 매기를 문전 박대한다. 매기는 담배를 피운다. 그녀는 아들에게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했었다. 매기는 이리나 팜이다.


 매기는 미키를 냉랭하게 대한다. 그 와중에 매기의 명성을 들은 경쟁업체들이 매기를 유혹한다. 매기는 그 사실을 미키에게 알린다. 미키는 나중에 얘기하자고 말한다. 매기는 그대로 떠난다. 미키가 매기를 찾아간다. “왜요? 당신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또 다른 루이사일 뿐이죠”. 매기가 말한다. “당신은 루이사가 아니에요”. 미키가 말한다. “물론 아니죠. 난 값이 나가니까. 난 사업이죠”. 매기가 다시 말한다. 그녀는 신세한탄을 한참 늘어놓는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미키가 묻는다. “있고 싶어요. 더 자주 웃으세요”. 매기가 답한다. 

 매기와 미키의 관계는 봉합되었다. 그 관계에 아들이 개입한다. 그는 진작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매기는 섹시월드에서 아들과 만난다. 비밀이 그렇게 밝혀진다. 아들은 매기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소리친다. 그렇지 않으면 매기는 손자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아들 앞에서 미키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말한다. 돌아가겠다고. 매기는 돈을 구했다. 손자는 이제 호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매기는 섹시월드로 돌아간다. 그리고 매기와 미키는 입을 맞춘다.

 <이리나 팜>이 억지스러운 플롯이라는 비판을 받은 데에는 결말의 책임이 크다. 매기는 손자를 위해 섹시월드에 정박했지만 그곳에 정착하고 말았다. 그것은 충분히 비이성적이다. 그런데 세계가 그렇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차고 넘친다. 세계가 비이성적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세계가 이성적이라면 예술이 사랑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술을 즐기는 올바른 방법은 그것의 비이성성을 해명하려는 내적 투쟁이라고 믿는다. 그 투쟁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의 망각이다. 우리는 세계 속 존재로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산다. 그 세계를 잠깐 망각해야 한다.


 매기는 돈을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대출도 구직도 거절되었다. 매기가 늙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장 아메리는 사회적 연령은 타인으로 말미암아 측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화는 몸의 사건이다. 정신은 그것을 겪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다. 노인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지만 타인은 그렇지 않다. 노인을 위한 미래는 없다. 노인은 자신의 믿음과 타인의 거절 사이에서 방황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덧 타인의 것을 내재화해 좌절하고 만다. 매기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좌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자가 죽고 있었다. 그래서 매기는 섹시월드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호스티스는 매춘부였다. 하지만 매기는 늙었다. 그녀는 매춘부도 될 수 없었다. 그래도 매기의 손은 부드러웠다. 손바닥만큼의 쓸모는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매기는 자위서비스를 하기로 했다. 그 서비스는 매춘보다 값이 저렴했다. 손님 대부분이 돈 때문에 매춘을 즐기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류인생들이다. 매기는 손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매기의 노동은 손자를 위한 희생이었고, 그들을 위한 위로였다. 매기의 일터는 빨간 방이었다. 빨간 버튼, 빨간 불, 그리고 빨간 구멍. 잿빛 벽을 빼고 모든 것이 빨갛다. 성경에서 빨간색은 중의적이다. 부정적으로는 죄, 탐욕 등을 상징하고, 긍정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매기의 노동은 죄였고, 보혈이었다. 비밀이 밝혀지고 아들은 매기를 매춘부라고 불렀다. 그러나 매기는 자신은 매춘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매춘부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매기는 자신의 노동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터를 꾸몄고 페니스 엘보를 영광의 상처쯤으로 생각했다. 매기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말했다. “내가 이리나 팜이야. 내가 최고지”. 매기는 분명히 변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미키가 있었다. 그는 매기에게 이리나 팜이라는 가명을 붙여주고 그녀를 “런던 최고의 오른손”이라고 칭찬했다. 그전까지 매기는 쓸모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미키가 그 쓸모를 인정해 준 것이다. 매기에게 그것은 크디컸을 것이다. 그래서 매기는 주체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못 볼 꼴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매기가 이리나 팜으로서 자신을 소개했을 때 친구 제인(제니 에구터 분)은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제인은 사실 매기의 죽은 남편 트레버와 밀회를 즐기던 여자였다. 매기는 그 사실을 남편으로부터 들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나 팜이었다. 매기는 제인 부부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 든 액자를 부수고 제인에게 망신을 줬다. 제인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매기는 매기가 아니었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이 매기를 연기했다. 페이스풀은 <This Little Bird>로 60년대 영국의 팝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무비스타이기도 했다. 페이스풀은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출연했고 미남 배우 알랭 들롱과 영화를 찍었다. 작은 새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 밴드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가 전부 망쳤다. 믹 재거의 여성 편력과 헤로인 중독이 어렸던 페이스풀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것이다. 페이스풀은 “믹 재거는 절 구원해 주러 온 신처럼 보였”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믹 재거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였을 것이다. 매기의 일터 소호에서 페이스풀은 2년 동안 부랑자로 살았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비롯한 지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매기를 연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79년 런던에서 페이스풀은 재기 앨범을 발표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작은 새일 수 없었다. 위스키, 줄담배, 그리고 헤로인이 소리를 바꿔 놓았다. 그러나 70년대는 펑크의 시대였다. 페이스풀의 소리는 그 시대에 부응했다. 페이스풀은 재기에 성공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페이스풀이 회고한다. 페이스풀의 삶의 굴곡은 매기의 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어떤 글들은 페이스풀의 삶을 <이리나 팜>의 전제로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페이스풀은 <이리나 팜>에서 자신은 페이스풀을 연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마리안느 페이스풀이 아니었다.

 “A는 A가 아니었다”라는 명제는 A가 B나 C라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A라는 고정된 실체에 저항할 뿐이다. “A는 A가 아니었다”라는 명제는 나의 세계를 망각한 결괏값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리나 팜>의 매춘부는 매춘부가 아니었고, 매기는 매기가 아니었으며,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마리안느 페이스풀이 아니었다. 덧붙여진 설명은 가설이다. 전부가 미결인 채로 남아 있다. <이리나 팜>은 클로즈업 그리고 페이드아웃으로 그 상태의 지속을 돕는다. <이리나 팜>은 두 기법을 넘치게 활용하고 있다. 카메라는 특히 매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프랑스 영화학자 자크 오몽은 “얼굴이 외양, 가시적인 것과 내재성, 비가시적인 것 등의 상이한 양극을 모두 담는다”라고 말했다. 얼굴은 보고, 보이는 곳으로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매기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곳에서 고정된 실체를 목격할 수 없다. 페이드아웃은 화면 전환 방식의 하나다. 그것은 어떤 장면을 무화한다. 까맣게 칠해지는 사건은 망각이다. <이리나 팜>의 페이드아웃은 그것을 상기시킨다.


 <이리나 팜>은 노동영화다. 노동영화는 노동의 가치와 그것을 통한 노동자의 자기 인식을 조명한다. 매기는 노동했고, 이리나 팜이 되었다. 이리나 팜은 호주로 가지 않고 섹시월드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미키가 있었다. <이리나 팜>은 매기와 미키의 해피엔딩을 암시한다. 그러나 둘의 입맞춤은 결국 페이드아웃되었다. 매기가 “당신 미소가 정말 좋”다고 고백했을 때 미키는 “당신 일솜씨가 좋”다고 말했다. 해피엔딩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어쩌면 매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도 그렇다. 사랑하는 까닭을 밝히기란 지난한 일이다. 기껏 해봤자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까닭이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지의 고백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무모한無謀漢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나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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