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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달샘 Oct 03. 2023

핑크는 여기서 시작된다

창비청소년시선44_최설 시집


핵이쁨 핵짜증 핵피곤 핵잔소리


오늘따라 신호등은 핵느림

버스는 저기서 핵뒤뚱

발을 디딜 틈도 없이 핵가득


오늘도 핵핵거리며 들어간 교실

이 안엔 어디도 표정이 없다

두 손에 폰을 말아 쥐고서


핵귀염 핵답답 핵무식 핵나댐 핵폭발


저기요 똑똑

너 아직도 폰 속에 있니?


아빤 맨날 늦게 오잖아

제발 핵심만 해 주세요


쫌!


뉴클리어 우리의 핵은 언제나 

폭발 직전



없다


톡방을 열었을 뿐이고

너를 초대했을 뿐이고

다른 애들이 욕을 했을 뿐 

경찰 앞에서 나는 입술이 없다


우리 애 원래 안 그래요

집 학교밖에 모르는 애라고요

소리 한번 지른 적 없는 애예요

놀이터에서 사람을 때리다니

말도 안 돼 얘가요? 욕도 잘 모른다고요


아니 학교는 도대체 뭘 한 거야

애들 똑바로 교육했어야지

다들 책임져요 우리 애가 아니라 여기 탓이야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17조에 의하여

서면 사과 및 봉사 활동을 시행합니다 이의가 있을 시 재심을 청구하거나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없습니다



오래된 족보


태초에 학교 뒷산에는 나무와 그가 있었다 그의 옷이 더블인지 싱글인지 정확하진 않았지만 전설 속에서 선배들은 옷에 귀신이 붙어서 간다고 했다 뒷산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가 맨발일까 아닐까 내기를 했다 한여름엔 더위를 식히러 오며 한겨울엔 오들오들 떨고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졸업을 앞둔 겨울까지 우리는 복도를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족보처럼 우리는 화장실 구석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시선을 위에만 둘 것 

눈은 힘주고 외칠 것

아저씨 그거 옷깃 열지 마시고요

안 놀랐거든요 관심 없어요

공연 음란죄 몰라요?(돌아서서 신고해)

아, 하나 더 후배님

너는 잘못이 없고

잘하고 있어

오늘도 씩씩하게 걸어가


우리도 생각이 있다


배를 접는다

칠판 가득 노란색 침묵

그날 이후로 어른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


묵념이라고 소리를 내면

이미 무거워

머리가 큰 인형처럼 넘어질 것 같다

눈을 감자 어느새 차가운 바닥 위에서


함께 있었다 손을 잡고

복도와 창문 하나하나 두드리면서


안녕

안녕

철썩


파도는 바다가 보내는 수신호

돌아서는 얼굴마다

두드린다 이토록 오래 접은 안녕


바다의 바닥을 더듬어 보는

두 눈은 까맣고

우리는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 간다


칠판 위에도 창문 밖에도 민들레

오늘도 아낌없이 노랗게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여중 국어선생님이 되고 아이도 딸만 둘이라는 최설샘이 시를 쓰셨다.

여중생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쳤다>에서 오빠를 좋아해 부풀어오르는 마음과 <내 사랑 언니>에서 선배언니를 좋아하는 마음도 보인다. <핵>, <꼽> 에서 아이들 언어로 들여다보는 중학생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반국 사람>에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시선이 느껴지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있고, <한 개의 심장>에서 엄마없이 아빠와 사는 아이의 마음이, <기사 양반 신여사>에서 하루가 힘겨운 엄마를 이해하느라 애어른 되어버린 속깊은 아이가 보인다. 


시를 따라가다보면 가벼운 듯 가벼울 수 없었던 내 중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오래된 족보>는 내 여고시절 뒷산에도 있었던 바바리맨이 세대를 뛰어넘어 여중 뒷산에서 아직도 출몰하는 이야기라 흥미로웠다.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을 수 있는 사연이 아닌데, 오래된 기억은 웃지 못할 일도 웃음으로 기억하게 하는 묘미가 있다.  나 어렸을 때 저런 똑똑한 족보를 물려주는 선배가 없었던 게 아쉽다. ㅎㅎ


<없다>에 드러난 학폭 가해학생 부모님 대사를 보고 대한민국 어디든 우선 자기 아이만 보호하려는 부모의 이기심은 비슷하구나 싶었다. 책임있는 말과 행동보다 학교 탓, 교사 탓으로 면피하려는 마음 앞에 가해 학생은 늘 있으면서 없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보인다. 


올해는 세월호 10주기가 되는 해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중세 봉건시대에도 잘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무더기로 사라져갔다. 우리는 여전히 안전 불감증 사회에서 세월호 사건의 변주를 겪으며 다친 마음조차 호소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어른이라는 단어는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다. <우리도 생각이 있다>를 읽고 또 고개를 숙인다.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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