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토, 가을빛 속에서

미래는 아직도 남아있다

by 전병근

교토, 가을빛 속에서


10월의 끝자락, 교토의 하늘은 유리처럼 맑았다.

공기는 얇은 빙결처럼 차갑고, 햇살은 단풍잎 사이를 비집고 은빛 가루처럼 흩어졌다.

역 앞 거리에 내리자, 가을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바람은 느리게 흐르며 오래된 절의 종소리를 실어왔다.

그 울림은 이 도시의 시간처럼 깊고 느렸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래된 기억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언덕을 오르는 길가에는 전통 가옥들이 낮게 이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 국화와 단풍이 어우러져 있었고, 붉은 리본을 단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갔다.

아기의 손에는 곰 인형과 반쯤 녹은 솜사탕이 들려 있었다.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춘 그들의 모습이 문득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삶이란 어쩌면 저 아이처럼, 잠시 멈춰 길을 헤매는 일들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멈춤이야말로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인지도.

나는 천천히 청수사로 향했다.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끝에서 가을의 소리가 났고,

붉게 물든 단풍이 햇살 속에서 반짝이며 내 마음 한가운데를 물들였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지난 세월이 어깨 위에 내려앉는 듯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52세의 가을, 낙동강 수문 견학길에 처음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자신이 늙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세월은 흘러간 뒤에야 비로소 그 무게를 알게 되는 것임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청수사 본당에 이르자 교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붉은 단풍과 검은 기와, 하얀 종이등이 얽힌 풍경은 오래된 그림처럼 고요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은 어느새 내 삶과 닮아 있었다.


산넨자카로 내려오면서 좁은 돌계단 사이로 찻집과 기념품 가게가 이어졌다.

바람에 종이등이 흔들리고,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46개의 계단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추었다.

이곳에서는 계단에서 넘어지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미소지었다.

넘어짐조차 위로로 바꾸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걷다 보니 전통 기와로 덮인 스타벅스가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라테 한 잔을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홀로 앉은 나의 고독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고독이 반드시 외로움은 아니라는 사실을, 세월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오후에는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도게츠교 아래로 흐르는 오이강의 물결이 햇살을 머금고 있었고,

대나무 숲에서는 바람이 낮은 음색으로 울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억눌린 선택들, 원하지 않았던 책임들, 스쳐간 이름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상처가 아니라 내 삶의 결이 되어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게이샤처럼 살아온 것은 아닐까.’

원하지 않았던 교육, 선택할 수 없었던 직업,

누군가 정해놓은 길 위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삶.

그 길은 나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지만, 분명히 내가 걸어온 길이었다.


35년 동안 살기 위해 일했고, 성공이라는 단어를 좇아 몸부림쳤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여러 번 황폐해졌고,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러나 빈곤은 끝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지 않느냐”고.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을 해보지 못한 채 흘러간 세월,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비극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는, 나의 진짜 길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닐까.”


바람이 불었다.

대나무가 흔들리고 단풍잎이 허공에서 빛을 흩뿌렸다.

나는 그 바람에 얼굴을 맡기며 조용히 다짐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도 믿는다.

나는 여전히 시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다.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바다가 그리워졌다.

언젠가 낙동강 하구에서 바라보던 서쪽의 바다,

붉은 해가 수평선 아래로 꺼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다 냄새가 없는 교토의 가을이지만

내 마음에는 오래전부터 파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파도는 내 안에서 더 크게 출렁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바다를 걸었다.

푸른 어둠 속, 흰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을 가르며 날고 있었다.

그 갈매기는 어쩌면 젊은 날의 나였을 것이다.

세상의 바람에 밀리고 상처받으면서도 다시 날아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나.

이제 나는 그 갈매기를 멀리서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높이 날지 않아도 괜찮다.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교토의 가을빛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산의 계단을 오르는 일만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든 슬픔은 결국 바다로 스며들어 잔잔한 물결이 되고,

그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울며 날아오른다.

나는 오늘, 그 갈매기의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단풍잎처럼 흩날리는 기억들 사이로 바다의 향기가 스며든다.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서, 여전히 봄을 꿈꾸며

나는 다시 한 번 바다를 향해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