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울릉도 이사
시골의 이삿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울진 매화에서 포항까지는 육로로, 그리고 포항에서 울릉도까지는 배로 건너야 하니, 이번 이사는 육지와 바다를 모두 가르는 여정이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했기에, 아버지는 짐을 줄이라며 연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 아들 셋과 함께 가져갈 것이라곤 옷가지 몇 벌뿐이었다.
짐은 니어커, 그러니까 소달구지에 실렸다. 앞에서는 아버지가 끌고, 뒤에서는 두 형이 밀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마을 어귀를 지나갈 때, 친척 몇 분은 눈시울을 붉혔고, 어떤 어른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시원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가족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미묘하게 섞여 있던 공기와 표정의 온도는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짐을 먼저 화물 회사에 맡기고 돌아온 지 이틀 후,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함께 가지 못하는 큰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부엌에서 펑펑 울던 어머니의 어깨가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눈물이 단순한 이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날, 큰형은 고모님 댁에 남았다.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가족의 이별이었다.
그때 나는 여섯 살, 큰형은 열네 살, 둘째 형은 아홉 살, 막내 동생은 세 살이었다.
포항으로 향하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털털거리며 먼지를 일으켰다. 포항은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시장 구경을 하던 어머니는 잠시 길을 잃었고, 모두가 당황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여관집 골목길을 기억해내어 돌아올 수 있었다. 아마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지나온 풍경을 하나도 흘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튿날, 굵은 뱃고동 소리와 함께 울릉도로 향하는 배가 출항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5년을 살게 될 줄은 그 당시 알지 못했다. 멀미가 심했던 나는 배가 흔들릴 때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 위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흐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울릉도 도동항이었다.
항구는 좁고, 바다는 깊었다. 우리가 탄 배는 접안부두도 없이, 산 중턱에 계류색을 걸어 둔 채 어설프게 정박해 있었다. 마치 화물처럼 사람들을 토해내듯 내보내던 그 장면이 어쩐지 생경했다. 하지만 내게는 처음 보는 거대한 배였고, 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린 가슴이 벅찼다.
섬에 도착하자 먼 친척 두 분이 나와 식사를 대접해 주셨고, 곧바로 논밭을 팔아 장만한 집으로 향했다.
집이라고 해도, 고향의 기와집에 비하면 초라했다.
코딱지만 한 단칸방 하나.
그러나 월세도, 빚도 없는 ‘우리 집’이었다. 그것이 묘한 위안을 주었다.
고향에서는 마루가 딸린 세 칸짜리 기와집에 살았던 우리가, 이제는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모두 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울릉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왜 우리가 울릉도에 와야 했는지.
훗날 알게 되었지만, 당시 울릉도는 오징어잡이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 희망 하나에 인생을 걸어 보려 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심해지면서, 고향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던 것이다. 섬에 들어온 후 아버지는 점점 술에 의지하며 무너져 갔다. 오징어 배에 오르긴 했지만, 그 삶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울릉도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희망이 아닌,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는 바다를 좋아했다.
새벽마다 항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눈을 뜨고, 오징어 배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 장면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세월을 지나온 지금은 안다.
울릉도에서의 첫 이사.
그날부터 내 인생의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