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힘들었던 울릉도 생활
울릉도에 들어온 다음 해, 나는 우산초등학교(지금의 울릉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섬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삶의 팍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먹을 것은 늘 부족했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비쌌다. 과일은 제삿날이나 되어야 겨우 맛볼 수 있었으니, 사과 한 알은 우리에게 그림 속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형편이 나은 가겟집 친구가 사과를 들고 다니면 늘 부러움이 일었다.
친구는 아까운지 한입도 나누지 않았고, 그가 다 먹고 남겨둔 사과 줄기만 바라보며 ‘저게 왜 저리 맛있어 보일까’ 하고 삼켰다. 그만큼 우리는 배고팠다.
식탁에는 보리밥이나 조밥이 전부였고, 반찬이라고 해봐야 팔지 못하는 상처 난 생선이나, 몸통이 잘린 오징어 회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제삿날, 소풍날만큼은 천국이었다. 그날만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스스로 벌어 먹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연탄 배달이었다.
도동항은 거의 모든 길이 비탈이어서 리어카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어른들은 리어카를 썼지만, 어린 나는 등에 지고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과일 궤짝을 주워와 지게를 만들었다. 깨진 판자를 모아 못을 박고, 줄을 엮어 간신히 한 벌의 지게를 완성했다. 그 지게에 연탄 세 장을 얹고 비탈길을 오를 때면 다리는 후들거리고 어깨는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넘어지면 연탄이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공장에서는 무게만 맞으면 새것으로 바꿔주었다.
연탄배달은 한 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절이 바뀌면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사과 궤짝 주워 팔기, 칡 캐기, 머루·다래 따기, 토끼 키워 팔기, 오징어 다리 떼기…
먹고살기 위해 뭐든 했다.
어린아이에게 배고픔은 곧 ‘창의력’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힌 건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배고픔보다 훨씬 더 깊고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처음 울릉도에 들어온 아버지는 오징어 배를 타며 성실하게 일하셨다. 하지만 술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변해갔다. 배가 만선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부두엔 환호와 웃음이 가득했지만, 집 안은 싸움으로 얼룩졌다. 빈손으로 돌아온 아버지, 그를 나무라는 어머니, 그리고 겁에 질려 친구 집으로 도망치던 형제들.
그때의 장면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처럼 남아 있다.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충돌이 잦았고, 다리를 다치게 하거나 치료비를 내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은 뒤집혔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집을 나갔다가도 결국 우리를 두고 떠날 수 없어 돌아오셨다.
한 번은 여동생만 데리고 육지로 나가 일주일 넘게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때 남동생과 나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다시는 안 오는 걸까…?”
그 불안이 어린 시절 가장 길고도 어두운 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그날은 지금도 생각해도 가슴이 툭 놓이는 순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작은형은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보다 현실이 더 빨랐다. 아버지의 폭력과 집안의 소란에 지친 형은 스스로 집을 떠나 가구점에 취직해 그곳에서 살기로 했다. 그 뒤로 형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혼자 살아갈 형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며온다.
그해 겨울, 울릉도엔 유난히 큰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흰빛으로 뒤덮이자 우리는 마냥 신났다.
스키도 눈썰매도 없던 시절, 우리는 직접 ‘대발스키’를 만들었다.
대나무밭에 몰래 들어가 스무 개쯤 베어 와 다섯 개씩 나란히 맞춰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철사를 끼워 고정했다. 마지막엔 촛불 위에서 앞부분을 휘어 올리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태우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기에, 그 순간은 숨을 죽여야 했다.
마침내 스키가 완성되자, 하늘에 눈이라도 내려주길 매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아침, 세상은 하얗게 빛나 있었다.
약수터 비탈길을 향해 달렸다.
어머니는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그날 나는 꼭 타야만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눈길은 미끄럽고 옆은 깊은 하천이었다.
몇 번은 신나게 내려왔고, 다시 올라가던 중 눈 덮인 풀밭을 밟는 순간—
내 몸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다리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그다음 기억은 없었다.
눈을 뜨니 보건소였다.
머리는 깊게 꺼져 있었고, 스무 바늘 넘게 꿰매야 했다.
정수리를 겨우 비껴간 자리라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라 했다.
지금도 비가 오면 그 자리에 물이 고인다.
그 흉터는 내 어린 시절의 상처이자, 내 삶의 흔적이다.
의사는 말했다.
“너무 열심히 공부시키지 마세요.”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부모님은
“공부 너무 하지 마라”
하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그 말은, 아마도 가난과 불운을 견디며 살던 부모님이 스스로에게 건네던 작은 위로였을 것이다.
울릉도에서의 삶은 언제나 ‘먹는 문제’와의 싸움이었다.
1970년대 초의 울릉도에는 과일나무가 거의 없었다.
감도, 밤도, 대추도—
육지에선 평범한 것들이 섬에서는 희귀한 보물이었다.
우리는 늘 배고팠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바다뿐이었다.
오징어 철이 되면 아버지들이 잡아온 오징어를 팔아 밀가루를 사왔다.
부모님이 없을 때면 우리는 그 밀가루를 후라이팬에 부쳐 부침개처럼 먹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진짜 간식’은 따로 있었다.
대나무 꼬챙이를 들고 수협 창고에 몰래 들어가
명태 눈알을 빼먹는 일.
어른들도 “눈 좋아진다”며 모른 척해 주었다.
그게 울릉도식 사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빵서리 사건’이 터졌다.
포항에서 화물선이 건빵을 싣고 들어온 날이었다.
포대들이 다섯 단으로 쌓여 있었고, 우리는 몰래 그 사이로 들어갔다.
동생들이 포대 밑을 칼로 찢어 건빵을 꺼내던 중,
포대가 무너져 동생들이 아래에 깔려버렸다.
“살려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다행히 인부들이 달려와 동생들을 꺼내주었다.
무거운 화물이었으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동생들은 건빵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인부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죽는 것보다 건빵이 더 중요했나 보지?”
하지만 다음날 이 일은 학교에 퍼졌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한 달 전, 나는 경상북도지사 표창을 받은 ‘모범생’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 마음속에 남은 생각은 하나였다.
“제발… 먹을 게 있었더라면,
우리가 왜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이제 세상은 그때와 너무나 달라졌다.
우리 아이들은 먹다 남긴 음식을 버릴 만큼 풍족하게 자란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시절 배고팠던 나의 어린 날이 문득 떠오른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도 웃음 잃지 않던 그 시절,
그 속에는 분명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의 나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