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조상의 이름으로

조상과 가족의 이력

by 전병근

조상의 이름으로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두 갈래로 흘러온다.

학교에서 배우는 정사(正史)가 한 줄기라면,

사람들의 입에서, 책의 여백에서 비밀처럼 흘러 내려온 야사(野史)는 또 다른 줄기다.

승리자의 기록과 기득권의 시선으로 정리된 역사 속에서

진실은 언제나 절반 정도만 얼굴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늘 생각한다.

역사란, 기록된 사실만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마음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고.

그 생각은 우리 조상을 떠올릴 때 더 짙어진다.

고려가 무너지고, 이씨 왕조가 들어서던 어수선한 시절.

태조 3년, ‘왕씨 몰살’이라 불리는 비극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사료가 소실되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조차 당시 전모를 온전히 전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야사의 그림자 속에 살아남았다.

강화도, 삼척, 거제도의 바람은 왕씨 왕족들이 처형된 피비린내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왕(王)의 획을 틀어 전(田)이라 하고, 혹은 옥(玉), 금(琴), 마(馬), 차(車)처럼 전혀 다른 표정의 성씨로 갈아입고 숨어 살았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하고, 왕을 상징하는 용(龍)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다.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 집안의 이름 또한 새롭게 시작되었다.


사라진 이름의 시작 바람이 스산하게 흐르던 어느 가을 저녁.

나는 서랍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오래된 족보를 펼쳤다.

갈색으로 바랜 종이 냄새가 방 안에 퍼지고, 잊혀진 이름들이 빗물처럼 흘러나왔다.

‘전(田)씨, 담양 출신.’ 한 글자, 단 세 획.

그러나 그 안에는 왕(王)의 유전처럼 가려진 그림자가 있었다.

한때 왕조였던 집안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를 어떤 남자의 흔적.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왕족이기를 멈추었다.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이름을 버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왕씨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살아남은 자”였다. 그의 삶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이름을 바꾸어 지켜낸 생존이 오늘의 나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나는 그 종잇장 위에서 사라진 이름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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