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세 여인의 이야기

조상과 가족의 이력

by 전병근

세 여인의 이야기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바라볼 때마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한 가문의 역사가 되는지 깨닫곤 한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우린 전(田)씨다. 왕의 피가 흐른다.”

그 말이 때로는 허세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 속에는 한 인간이 버텨온 세월과 자존심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이 들어서며 사라진 이름들.

왕(王)에서 전(田)으로, 혹은 다른 성씨로 바꿔 숨어 살아야 했던 조상들.

그들은 더 이상 권세를 지닌 왕족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버리고 삶을 택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 끝에서, 아버지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세 분의 할머니가 있었다.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인들이 들고나는 잔혹한 시대였다.

첫째 할머니는 묵묵히 버틴 분이었고, 둘째 할머니는 봄꽃처럼 짧게 머물렀으며, 셋째 할머니는 긴 세월을 한숨 속에 살아냈다.

그러다 마침내 첫째 할머니가 한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내 아버지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자’라는 이름의 굴레를 짊어진 채, 그는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사랑받지 못한 장자였다.

고기 한 점은 더 받았지만, 따뜻한 손길 하나는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모들과 작은아버지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자라며, 세상을 향해 몸을 단단히 굳혔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늘 말수가 적었고, 늘 홀로 견뎠다.


스무 살도 되기 전 군복을 입고, 그해 겨울에 부모님을 보내야 했다.

그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술이 대신 메웠고, 그 술은 때때로 가족의 밤을 괴롭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를 무너뜨린 건 술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져야 했던 이름, 책임, 고독이 그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울릉도로 떠났다.

모든 친척 관계를 등지고, 바람과 파도가 지배하는 섬에서 다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친척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차가운 말들만 전해왔다.

“큰집 자식들은 원래 그렇게 산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 가족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 앞에서.


나는 이제 비로소 이해한다.

아버지가 말했던 ‘왕의 피’란, 대단한 혈통을 증명하려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말은, 어떤 시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피가 우리 안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오늘, 그 피를 이어받은 아들로서 이 글을 쓴다.


아버지의 험난했던 길 위에 놓인 이름들, 사라진 이야기들, 그리고 다시 이어진 가족의 역사.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 쓰겠습니다.

왕의 후손이라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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