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고향을 등지게 된 계기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학교생활이 점점 힘들어지고,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그런 사람은 내 곁에 없었다.
어쩌면 내 스스로 외톨이가 되기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그는 공부를 위해 서울로 전학을 갔지만,
적응하지 못해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학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재수를 하게 된 그는
다시 내 반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상처를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금세 마음이 통했다.
어느 날, 집에서 아버지의 심한 술주정 끝에
참아선 안 될 일을 저질러 버린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아 친구에게 술을 사 들고
학교 근처 연호정으로 향했다.
나는 모든 얘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친구는 “그건 무조건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위로보다 더 깊은 괴로움을 느꼈고,
결국 우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빠지고 술을 마신 우리를 발견하셨다.
그리고 아무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친구만 매를 맞게 하셨다.
나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저도 함께 벌을 받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내 말을 듣지 않으셨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왜 그러셨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달 전, 우리 반에는 교사에게 대들며 교복을 벗어던진 학생이 있었다.
당황한 선생님을 대신해 나는 그 학생을 막아서며
“이건 아니야!”라며 주먹을 날렸다.
그 덕분에 사건이 수습되었고, 선생님은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에,
선생님은 이번 일도 내 편에서 봐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친구는 혼자 벌을 뒤집어썼고,
그 일은 훗날까지 내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더구나 몇 해 뒤, 대학생이 된 내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살이었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후로 나는 고향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오랜만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술 취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동네 형님 셋이 아버지를 질질 끌고 집 안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그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안방에서 아버지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처음엔 참았다.
아버지의 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먹질과 발길질이 계속되자 내 안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보자 눈앞이 새하얘졌다.
칼을 쥔 손이 떨렸고, 눈앞에 있던 형님들은 놀라 도망쳤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채, 나는 기둥을 향해 칼을 깊숙이 꽂았다.
그 소리에 놀라 달려온 어머니는 “설마 네가…” 하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날 밤, 나는 한참을 울었다.
분노는 사라졌지만, 남은 건 허무함뿐이었다.
광으로 들어가, 토끼나 꿩을 잡을 때 쓰던 ‘사이나’(극약)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걸 먹고 다 끝내버릴까…”
그 순간, 세상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고향 사람들을 피했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는 했지만, 마음속엔 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자리했다.
안방 기둥에 박힌 칼자국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상처로 남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가리기 위해 문풍지를 덧발라 주셨다.
그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보여주신 침묵의 위로였다.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고향을 가지 않는다.
고향 사람들의 모임, 향우회, 동창회… 모두 내겐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다.
누군가는 “고향은 마음의 뿌리”라 말하지만, 내게 고향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