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놀라운 마지막 고등학교 생활
세월이 흘러 중학교 친구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날 때,
나는 아직도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재수를 하며 늦게 들어간 탓에 나이는 이미 또래보다 빨랐고,
1·2학년 내내 외톨이처럼 지냈다.
미래도, 꿈도, 위로해줄 누군가도 없는 시절이었다.
하루하루가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처럼 흘러가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마지막 1년만, 죽기 살기로 해보자.”
그 결심 하나가 모든 것을 뒤바꿨다.
담임선생님이 경북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경북대 4년 장학생’이라는 무모한 목표를 세웠다.
가난한 집 아이가 대구로 유학을 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서울도, 대구도 아니어도 좋았다.
단지 이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동안 놓아버렸던 책을 다시 들었다.
특히 영어는 절망적이었다.
2년째 한 줄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해 입시 제도가 바뀌어 외국어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미련 없이 일본어를 선택했다.
나이 많은 선생님은 문법 설명조차 버거워했지만 나는 문법 따위 포기한 채 책 두 권을 그대로 외웠다.
외울 수 있는 건 다 외웠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술 냄새는 매일 저녁 집안을 뒤덮었고,
나는 책 한 장 편히 펼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집이 아닌 학교를. 아침엔 도시락 두 개를 싸갔다.
하나는 점심으로, 하나는 저녁으로. 밤엔 교실 바닥에 모포 두 장을 깔고 누웠다.
겨울이 오자 마루는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나는 더 두꺼운 이불을 몰래 사물함에 감춰두었다.
담임선생님은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 주셨다.
밤 10시면 경비 아저씨가 퇴교를 재촉했지만 나는 후레시 하나에 의지해 다시 책을 펼쳤다.
어둠을 가르는 작은 빛 아래, 나는 외로움과 싸우며, 졸음과 겨루며,
어린 몸 하나로 세상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열 달. 기적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반에서 2~3등이던 성적이 어느새 전교 1등으로 올라섰다.
한 번도 누가 나를 칭찬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단단했다.
하지만 노력의 결실은 기대만큼 달콤하지 않았다.
학력고사 결과는 경북대 장학생의 문턱에 닿지 못했다.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재수를 하고 싶었으나 이미 한 살이 빠른 데다 병역법 개정으로 내 나이 또래가 조기 징집 대상이 되어 졸업과 동시에 영장이 날아오게 되어 있었다.
모든 길이 막힌 듯 보였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경북대를 갔지만, 사실 난 한국해양대를 가고 싶었단다.
자네는 그곳을 한번 생각해보게.” 처음 들어보는 학교였다.
하지만 기숙사와 등록금이 전액 국비 지원이라는 말을 듣자 막혀 있던 길 끝에 좁지만 확실한 문이 하나 보이는 듯했다.
군 문제까지 해결된다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부산 이모님 댁에 머물며 원서를 내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교문 앞에서 본 제복 입은 학생은 내게 처음으로 ‘미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며칠 뒤, 합격자 발표. 집에 들어서자 이종사촌 형이 반갑게 외쳤다.
“합격! 축하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그래, 드디어 이 고향집을 떠날 수 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겨울 들판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해 보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지게막대기를 들고 소리쳤다.
“이놈아! 그렇게 가지 말랬는데 왜 갔어!
우리 형편이 어떤 줄 알고!”
그 고함과 함께, 방금까지 가슴 가득 차오르던 기쁨은 눈물 한 방울로 무너져 내렸다.
그날,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합격 통지서. 내 인생을 바꾼 기적의 열 달은 그렇게 눈물 속에 조용히 끝났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날의 눈물은 패배가 아니라, 다른 삶으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문장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