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새로운 우정이 싹트는 대학생활
대학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자, 우리는 남해바다에서 해양훈련을 하게 되었다.
훈련 장소는 남해 상주 해수욕장이었는데, 울진에서 부산을 거쳐 남해까지 가려면 교통비가 적잖이 들었다.
차비라도 마련하기 위해 나는 채석장에서 2주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았다.
채석이 끝난 헐벗은 산자락을 정리하고, 홍수를 대비해 돌담을 쌓는 일이었다.
우리는 숙련된 석공들에게 돌을 건네주는 보조공 역할을 맡았다.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거나 소풀을 베던 시절에도 힘들다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무거운 돌을 날라 쌓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저녁이면 몸이 녹초가 되었고, 소주 한 잔으로 고단함을 달래며 겨우 잠들곤 했다.
그렇게 2주를 버텼건만, 간주가 되자 일을 맡겼던 반장이 시공사에서 우리 임금을 받아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2주간의 피와 땀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상으로 마신 소주 값도 못 갚을 처지가 되어 우리는 시공사를 찾아갔지만,
반장이 이미 우리 도장을 찍고 돈을 받아갔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결국 우리는 파출소에 신고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은 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인건비와 씁쓸한 허무함뿐이었다.
그 돈으로 간신히 차비를 마련해 남해로 향했다.
한여름의 모래사장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고,
그 위에서 우리는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혹독한 해양훈련을 시작했다.
목표는 단 하나 — 조난 시 4시간 이상 바다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수영 실력에 따라 A조부터 F조까지 나뉘었는데,
동해바다에서 자라 수영이 익숙했던 나는 A조에 속했다.
수영을 못하는 F조 친구들은 물보다 모래밭 위에서 PT체조를 하며 땀을 흘렸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던 친구가 있었다.
키가 크고 활달한 인천 출신 친구였는데, 물에만 들어가면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 한참을 웃었지만, 나중에 그 친구가 항해도중 남지나 해역에서 태풍을 만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 웃음이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그 친구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파도처럼 잔잔히 일렁인다.
4시간 동안 바다 위에 떠 있는 마지막 훈련 날, 한 시간쯤 지나자 나는 뜻밖의 곤란한 일을 겪었다.
오줌이 너무 마려웠지만, 수영을 하면서는 도무지 일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긴장해서 그런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었다.
결국 부이를 잡고 잠시 긴장을 풀어 일을 보고 나서야 다시 훈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결국 4시간은 2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그토록 고된 해양훈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훈련이 끝난 뒤, 우리는 반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계획했다.
젊음의 한가운데서 자유를 느끼고 싶었던 우리에게, 그 여름의 지리산은 또 하나의 무대였다.
야영을 하며 불빛 아래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어떤 친구는 여자친구를 불러 함께 오르기도 했다.
우리에겐 등반보다 그 여름의 추억이 더 중요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친구’라는 이름의 온기를 느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거쳐 고등학교를 간 탓에, 늘 어색하고 외톨이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나에게 이 친구들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첫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으며 우리는 조금씩 진정한 우정을 쌓아갔다.
지리산의 정상에 섰을 때, 우리는 젊음의 정점에 서 있는 듯했다.
밤에는 골짜기에서 텐트를 치고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때 함께했던 아홉 명의 친구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소중한 존재들이다.
졸업한 지 39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20대의 여름으로 돌아가 웃는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그때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삶의 무게에 지치던 내게, 그 여름의 바다와 지리산의 하늘, 그리고 친구들의 웃음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준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