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특수 대학의 모순성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향해 질주하던 시절,
국가는 인재를 길러 외화를 벌 수 있는 여러 특수 대학을 세웠다.
한국해양대학 역시 그 흐름 속에서 태어난 학교였다.
바다를 무대로 삼은 젊은 인재들이 외항선을 타고 달러를 벌어오면, 그것이 곧 국가의 밑거름이 되는 시대였다.
이 학교에는 대부분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던 학생들이 몰렸다.
나 역시 사범대학에 진학해 수학 교사가 되는 꿈이 있었지만,
집안 형편상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결국 해양대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국비로 교육받고 졸업 후 외항선에 승선해 국가에 기여한다는 취지는 훌륭했지만, 그 이면에는 특수 대학이 지닌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학 당시만 해도 한국해양대학은 상당한 명문이었다.
한때는 서울대 법학과와 경쟁률이 맞먹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갈 무렵에는 그 인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바다의 낭만보다 현실의 고단함을 먼저 체감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 학교의 매력은 점점 퇴색해가고 있었다.
학교의 운영은 사관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엄격한 규율, 군대식 생활, 그리고 선상에서의 질서가 철저히 강조되었다.
해기사는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이기에,
그만큼 강한 정신력과 단체생활에 익숙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기숙사 생활은 훈련소를 방불케 했고, 때로는 구타와 얼차려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했다.
당시엔 그런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기에, 그 누구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과연 그 정도의 폭력과 강압이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정규과정은 체계적이었다.
1학년 때 내무훈련을 시작으로, 여름방학에는 진해에서 병영활동을 했다.
2학년 때는 남해에서 해양훈련을 하며 조난 시 필요한 수영법을 배웠고,
3학년 때는 실습선을 타고 6개월 동안 바다 위를 누볐다.
그중에는 해외 원양 실습도 있었다.
4학년 여름방학에는 해군 장교 기본교육을 받으며 군사훈련까지 병행했다.
입학 초기, 우리에게 다섯 가지 학훈이 주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바다의 매골(埋骨)’이었다.
그 뜻은 “죽을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며 살라”는 다짐이었다.
진정한 해양인이 되어 바다에 뼈를 묻겠다는 결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과연 나는 그 다짐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옛날 우리 선배들은 정말로 그 다짐을 실천했다.
그들은 바다를 누비며 외화를 벌었고, 그 덕분에 가난하던 나라는 조금씩 일어설 수 있었다.
국가는 국비로 교육을 시킨 대신, 졸업생들이 승선 생활을 통해 그 비용을 ‘국가에 되갚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육상 근무자의 급여가 오르고 사회가 안정되자, 더 이상 바다의 일이 그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외항선의 급여는 예전만 못했고, 외로움과 위험만 남았다.
결국 많은 졸업생들이 3년 남짓 외항선을 타고 군역만 필한 뒤, 육상으로 떠나버렸다.
국가 입장에서는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자 해운회사를 통해 일부 급여를 공제해 가기도 했다.
그마저도 당시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특수 대학은 한 시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목적이 사라지면 그 존재 가치도 함께 희미해졌다.
나 역시 그 쇠퇴기의 한가운데서 학교를 다녔다.
한때는 국가 발전의 상징이었던 곳이, 이제는 그 빛을 잃어가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바로 특수 대학의 모순이었다.
목적이 사라지면 학교의 이상도 함께 사라지고, 그 안의 학생들만이 남아 외롭고 고된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마지막 세대 중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