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가기 시작했나
또 시작되는 대학생활의 갈등기
대학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무렵, 또다시 집안의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아버지의 술주정은 점점 더 심해졌고, 남아 있던 두 동생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고 호소했다.
남동생은 앞서 언급했듯, 동네 할머니 댁의 도움을 받으며 시골 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잘했지만, 시골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늘 갈등 속에 있었다.
큰형은 어릴 때부터 고모님 댁에서 자랐고, 작은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떠돌았다.
그나마 남은 두 동생마저 앞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나 또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 대신 막연한 공백기를 보내야 했다.
여동생은 중학교를 마치자 마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하루도 편치 않은 집을 떠나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학 때마다 나는 집안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름방학에는 돌을 캐거나 사방공사 현장에서 일했고, 겨울방학에는 세 달 가까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했다.
그 시절엔 과외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맥주집 서빙이나 생수 판매 정도였다.
기숙사 생활이 의무였던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소위 ‘직장 병행 학생’의 삶조차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방학이 다가오면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는 술에 취해 “네가 대학을 가서 집안이 더 힘들다”며 화를 내셨다.
그 말은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나는 오히려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짐이 된다는 생각이 나를 무너뜨렸다.
학교로 돌아가면 또 다른 고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3학년이 되면 실습선에 승선해야 하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멀미가 심했다.
배를 탈 때마다 어지럼증과 구토가 이어졌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이게 정말 내 길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직장이 바다라면, 나는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 무렵부터 학교 생활에 점점 적응하지 못했다.
밤이면 술 취한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났다.
그 상처는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것이었다.
후에 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대학에 간 이후 아버지의 폭력이 가장 심해졌다고 했다.
직접 그 시간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 말만으로도 평생의 미안함이 내 가슴에 남았다.
생활비조차 집에서 오지 않아 학교생활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동생의 월급은 12만 원이었는데, 그중 3만 원을 나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 돈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 어린 나이에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여동생의 마음을 생각하면, 차라리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저런 생각들이 겹치며, 나는 자퇴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자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부모님을 부산까지 오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내 자퇴는 퇴학 처리로 바뀌려던 찰나, 학교는 다른 친척의 연락처를 요구했다.
그때 나를 찾아온 이는 이종사촌 형님이었다.
형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의 아픔은 언젠가 지나간다. 졸업을 하고 나면, 네가 갈 길은 다시 열릴 거야.”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붙잡았다.
그 후 나는 어렵게나마 마음을 다잡고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버티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선택이 내 인생을 지탱해준 힘이었다.
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때의 나는 그저 휘청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한마디, 그리고 나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작은 의지가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고통의 시간이,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줄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