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음
내가 대학에 다니고 선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아버지가 어떤 모습으로 지내셨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의 술주정은 여전했고 오히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그 정점이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만큼, 그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한 미안함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술로 인생을 달래며 사셨던 아버지.
꿈속에서도 우리를 괴롭히던 아버지.
갈비뼈가 부러져도 술로 버티며 일만 하시던 그분이 어느 날 허리가 아파 누워만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다.
병원으로 모시고 갔을 때, 의사는 오래전 부러진 갈비뼈가 이미 굳어버렸다고 했다.
그 위에 또 하나의 뼈가 새로 부러져 있었으니, 어떻게 일할 수 있었겠는가.
입원 치료를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아버지는 다시 술을 찾으셨다.
그때부터 간경화가 시작되었고, 몸은 점점 무너져가며 누워만 지내셨다.
그러면서도 술을 찾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서울 본사 근무 2년차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향에 자주 내려갈 여유가 없었지만, 어느 날 밤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아버지는 술기운도, 화난 얼굴도 없었다.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그 음성이 너무 생생해서 나는 주말이 되자마자 고향행 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이미 간경화 말기였다.
복수가 차서 남산만큼 부푼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던 그분이 나를 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순간 —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 이틀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는 집에서 곧바로 장례를 치렀다.
입관을 하려는데, 복수로 부풀어 오른 배 때문에 관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이 “억지로라도 닫아야 한다”고 하여 형제들이 함께 뚜껑을 눌렀다.
그때의 소리, 그때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건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고통이 우리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장지를 미처 정하지 못해 5일장을 치르는 동안 밤마다 많이 울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슬픔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났다.”
그 해방감 속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이 뒤섞여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아버지는 불쌍한 인생이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사랑을 주는 방법도 받는 방법도 모른 채 살다 가셨다.
그러나 매 한 번 자식을 때린 적은 없었고,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우리를 다 키워 내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이었다고, 이제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아버지를 앞산 한 자락에 모셔드리고 나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처음엔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언젠가부터는 꿈에서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마음의 평화를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아버지의 삶은 내게 상처이자 교훈이었다는 것을. 그분의 불행이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오.
당신의 아들은,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