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자식 교육은 마음대로 안 된다

by 전병근

자식 교육은 마음대로 안 된다


두 아들의 유학길에서 깨달은 마음의 공부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에게 자신이 부족했던 것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마음이 누구보다 컸다.

학창 시절, 나는 하고 싶어도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뒤늦게 마음을 다잡았을 때는 이미 입시의 시간표가 끝나 있었다. 특히 영어는 내게 평생의 약점이었다. 외국인 앞에만 서면 입이 얼어붙고, 발음 하나에도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부족함을 자식들이라도 메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그게 ‘대리만족’이란 걸, 그땐 몰랐다.

2005년, 큰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였다. 나는 결국 결심했다.

“이 아이만큼은 세계 속에서 당당한 어른으로 키워야겠다.”

그리하여 두 아들을 차례로 뉴질랜드 유학길에 올렸다.

큰아들을 처음 떠나보내던 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길었다.

그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갈 때, 어릴 적 친척집에 맡겨져 부모를 그리워하던 나의 기억이 겹쳐졌다.

가슴이 미어졌고, 며칠 밤을 잠들지 못했다.

현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친구의 집에 맡겨졌지만, 부모가 아닌 이상 아들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버텼고, 1년 뒤 내가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그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자연스러운 영어 발음이 내 귀에는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그래, 보내길 잘했구나.’

그때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둘째 아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다만 작은아이는 형보다 적응이 느렸다.

나는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안심했지만, 그게 오히려 무심함으로 이어졌다.

1년 반 동안 아이를 보지 못했고, 그 시절의 외로움이 그 아이의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남겼는지는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귀국 후부터 문제는 조금씩 드러났다.

큰아이는 중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따라가지 못했고, 한국식 경쟁에 지쳐갔다.

둘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의 조짐을 보였다.

나는 불안했고, 아내는 밤마다 기도를 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영어보다 더 어려운 건, 아이 마음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결국 큰아이는 재수를 택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척추를 다쳐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숙학원에 들어가 1년간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자랑’이 아닌 ‘아들의 인생’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둘째 아들은 지방대에 진학했지만 성실함 하나로 군 복무를 마치고 먼저 사회인이 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교육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그리고 부모의 욕심이 늘 옳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어릴 적 “드럼을 사주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기에

덜컥 사주었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의 얇은 벽은 소음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드럼은 처분해야 했다.

그때의 허무함은 지금도 내게 남아 있다.

사랑이 때로는 실수의 이름으로 다가온다는 걸 그 후에야 이해했다.

이제는 안다.

자식은 내 뜻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저 부모의 기대를 딛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옆에서 조용히 등을 받쳐주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때의 결심을 떠올린다.

영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를 가르쳤어야 했다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나는 그저 바람처럼 따라 걸을 뿐이다.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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