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넌 용기 여주보 공사를 수행하며
4대강 공사 중 마지막으로 맡은 현장이 남한강 여주보였다.
이미 여러 개의 수문 공사를 수행해 온 나에게, 여주보는 마치 끝맺음의 과제처럼 다가왔다.
수문 제작의 난이도는 낮았고, 수익성도 크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는 이 공사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단순한 마무리가 아닌, ‘마지막 실험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원발주사는 삼성물산이었다.
공사는 비공개 입찰로 진행되었는데, 삼성물산은 우리가 참여하길 강하게 원했다.
그동안 플로팅 독(Floating Dock) 신조선 사업에서 좋은 파트너십을 이어온 인연 때문이었다.
주저하던 나의 마음속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여주보 수문의 작동은 유압실린더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시방서에는 독일산 실린더를 사용하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견적서를 검토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외산 실린더를 발주하면 납기가 절대 맞지 않는다.
공기를 지키려면, 방법은 단 하나—국산화였다.
“13미터짜리 실린더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을까?”
동료들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믿었다.
누군가 처음 시도하지 않으면,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
나는 피스톤만 독일에서 수입하고, 실린더는 국내에서 제작하기로 결단했다.
이후의 길은 험난했다.
13미터의 실린더를 깎기 위해 국내 세 곳의 공장이 동시에 작업에 들어갔다.
한쪽 끝에서부터 가공을 시작해 양쪽이 정확히 중앙에서 맞닿게 해야 했다.
단차가 생기면 모든 재료가 폐기된다.
실패는 곧 손실이었다.
결국 일본에서 원재료를 12개중 2개를 다시 들여오며, 수억 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밤새 공장에 불을 밝히며, 선반 위에서 반짝이는 금속의 정밀도를 바라보던 그 시간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완성된 국산 실린더는 독일산보다도 정밀했고, 강했다.
국내 최초의 13미터급 실린더 제작 실적이 탄생한 것이다.
그 순간의 전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불가능’을 밀어붙인 용기 하나로, 수십억 원의 원가 절감과 기술적 자립을 이뤄냈다는 사실이 나를 뜨겁게 했다.
그것은 기술자의 자존심이자, 내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현장 조립은 순조로웠다.
모든 수문이 강바닥 위에 제자리를 잡아가며, 여름 햇살 아래 반짝였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곧 장마가 시작되었다.
포크레인은 밤낮없이 가물막이 둑을 높였고, 우리 모두는 하늘만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삼켰다.
“비가 더 오면… 버틸 수 있을까?”
새벽 세 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가물막이가 터졌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는 쏟아지고, 강물은 미친 듯이 불어나 있었다.
잠시 후 서울 본사에서 사장님이 도착했다.
“보고서를 직접 작성해 본사로 올려야 하네.”
그 한마디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벽녘, 물살 속에서 사라져버린 수문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강물이 빠지고 나서야 현장의 처참한 모습이 드러났다.
거대한 수문들은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었고, 일부는 먼 하류로 떠밀려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계산과 계획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그때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손상된 수문은 모두 인천공장으로 옮겨져 다시 수리되었고, 유압실린더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작동했다.
재해보험 처리 덕에 비용 부담도 없었고, 무엇보다 국산화 덕분에 예상보다 큰 흑자를 남길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무모할 만큼 과감했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 있었기에, 불가능한 도전이 현실이 되었고 한국 기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때로는 용기가 만용으로 보일지라도, 그 용기 덕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여주를 지날 때면, 남한강 위로 빛나는 수문들의 곡선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금속보다 단단한 나의 신념과,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