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형님의 죽음과 나의 앞길
큰형님에 관한 이야기는 내 삶의 여러 페이지에 비처럼 스며 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 곁을 떠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런 처연한 성장 배경과는 달리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외로움이 만든 깊은 그늘 속에서도 인격은 반듯하게 자라났고,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 동안 친척집에서 지냈던 형님은 그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혼자 삭였을까. 그러나 그의 성품에서는 그런 상처의 흔적보다 사람을 끌어안는 넉넉함이 먼저 보였다.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나는 언제나 그를 존경했다. 객지를 떠돌며 살아온 그의 삶은 늘 고단했고, 경제적 어려움은 그를 오래도록 짓눌렀다. 때로는 아버지와 억센 말싸움, 심지어 몸싸움까지 벌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를 미워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아픔을 삭이며 버텨온 그의 세월이 더 아릿하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간경화로 쉰넷에 생을 마친 뒤, 형님 역시 간암으로 일흔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수님을 대신해 조카 하나를 홀로 남기고 떠난 형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더 컸다. 집안의 축이 쓰러진 자리에서, 나는 문득 ‘앞으로의 길을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묵직한 책임을 느꼈다.
작은형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떠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가며 가족과는 거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큰형님이 떠났을 때도 그는 장례식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가족이라는 울타리 바깥에서 오래전 잊혀진 사람처럼, 명절에도 조용히 사라져 버린 그림자 같은 존재.
그런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 집안의 외로움은 세월을 따라 낡은 벽지처럼 곳곳에 벗겨져 있었다. 행복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손으로 빚고 일구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제사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명절마다 반쪽짜리 모임이 이어지는 대신, 일 년에 두 번 날짜를 정해 콘도나 펜션에서 온 가족이 모두 모이는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남아 있는 형제들만큼은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살고 싶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고, 밥을 나누는 일. 그 단순한 일이 우리 집안에는 오래도록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갑작스러운 변화가 늘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꿈속에서 조상님들이 꾸짖는 듯한 장면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느껴온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지나치게 형식과 관습에 얽매인 제사는 이제 우리 삶과 맞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서로를 돌보고, 함께 웃고, 작은 온기를 나누는 것—그것이 내가 믿는 ‘제사의 본뜻’에 더 가까웠다.
큰형님이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다.
가족은 피가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의 끈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진실이다.
나는 오늘도 그 끈을 지키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이제 남은 길 위에서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