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조건으로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용기
사람은 누구나 예상치 못한 순간, 삶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합니다.
갑작스러운 질병.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그리고 모든 계획이 한순간에 뒤틀리는 사고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덮쳐올 때,
그 무지막지한 슬픔이 내 삶을 짓누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이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답을 내려줄 순 없죠.
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시인, 윤동주는
그 막막하고도 두려운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대답을 남겨두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
<서시>를 통해서 말이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짧은 시는 윤동주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시집의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사실 이 시에서 비롯됐죠.
죽는 날까지 바라보고자 한 '하늘'과
자신을 괴롭게 하는 잎새의 '바람'과
바람에 스치우는 '별'.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의지로서의 '시'.
어쩌면 <서시>의 진짜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한 편의 시 속에
윤동주의 정신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윤동주가 평생 끊임없이 되물었던 질문
“고난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처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세상은 늘 말합니다.
승리자가 되어라.
고난 따위는 보란 듯이 이겨내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극복하며 살아라.
하지만 윤동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기꺼이, 그리고 순순히,
수동적으로 고난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하죠.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살겠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왜 윤동주는 고난이 없는 삶보다
고난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을까요?
윤동주는 누구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답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고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특히 예수가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가 보여준 태도 속에는
“고난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라는
매우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אֵלִי אֵלִי לָמָה שְׁבַקְתָּנִי)”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아람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됩니다.
해골의 언덕, 골고다.
그곳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내지른 절규입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는 점잖은 히브리어가 아닌,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가장 본능적인 어머니의 언어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라 불렀던 신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온몸을 짓누르는 외로움과 공허.
기도해도 대답이 없고,
내가 해왔던 모든 노력이 다 무의미해 보이고,
삶 자체가 먼지처럼 느껴지는 시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의 이 절규에는,
우리가 인생의 밑바닥에서 쏟아내는
가장 인간적인 절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장면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십자가 위의 절규가 예수의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었다면,
그 직후 이어진 마지막 한마디는
고난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위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을 남기고, 예수는 고개를 천천히 떨구며 숨을 거둡니다.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신학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의 첫 절규는 우리가 고난 앞에서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과 같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왜 이런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는 겁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는 죽음이 임박한 그 마지막 순간,
그 질문을 멈춥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신의 선택에 맡깁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억울함과 고통 앞에서,
이유를 찾으려 몸부림치지도 않고,
고난을 이겨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그 숙명을
자신의 삶 전체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운명이 두려웠습니다.
십자가형을 앞둔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피눈물이 날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겨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누가복음 22장 42절에 기록된 이 기도는
예수 안에서 인간적인 두려움과 신적인 결단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순간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일을 없던 일로 해주세요.”
정말 인간적이죠.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예수조차
십자가라는 잔혹한 고난을 피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
그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려웠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기도의 마지막에서 예수는 말을 바꿉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한마디의 무게를 이해하려면
이 순간이 곧 유다의 배신, 체포, 조롱, 고문,
그리고 십자가의 형벌이 코앞에 다가온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고난을 피해 달아날 수도 있었죠.
그 영문 모를 고통에서 벗어날 선택지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도 않았고,
그 고난 앞에서 몸부림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고난의 잔을 직접 마시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 앞에서
유다의 입맞춤을 조용히 받아들이죠.
내 뜻이 꺾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을
내가 걸어가야 할 길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고난을 대하는 예수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신이 주신 형벌 같은 고난을 왜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을까요?
그저 신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 없어서 억지로 복종한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몬 베유의 저서 <중력과 은총>이 말하는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가 평생을 통해 천착했던 비움(케노시스)의 신학은,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해석하게 합니다.
“고통은 영혼을 벗겨 헐벗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헐벗기를 원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고 다가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분이 신성을 비우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처럼.”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이 ‘거룩한 헐벗음’을 완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라는 자아를 완전히 비워낸 것이죠.
그렇다면, 비워진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시인 윤동주를 사랑했던 목사 문익환은 『히브리 민중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민중을 ‘위하여(for)’가 아니었다. 민중의 하나가 ‘되어(becoming)’ 죽은 것이다.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죽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민중을 비굴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멍에를 메고, 민중이 마시는 쓰디쓴 잔을 마셨다. 십자가는 민중과 예수의 완전한 합일이다.”
예수는 저 높은 곳의 신적인 존재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아파하는 이웃과 하나 되기를 선택한 것이죠.
예수에게 고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자기희생이나 맹목적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체념도, 자포자기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아파하는 것.
그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예수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었던 것이죠.
예수의 이 거룩한 태도는 2,00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바로 시인 윤동주입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고난 앞에서
윤동주 역시 도망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피하고 싶었던 그 길을
“나한테 주어진 길”이라 부르며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심은 그의 시, <서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고난을 ‘쫓아내야 할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삶의 일부로서,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 담담한 고백에는
‘나’라는 존재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로 고난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형벌을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동주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사소한 바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잎새’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 잎새처럼 언제든 꺾일 수 있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에게 이는 곧 사랑의 조건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만이
타인의 고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순간을 인정해야
이 땅의 모든 흔들리는 존재들과 눈을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윤동주.
이 두 사람이 고난을 통해 발견한 진실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고난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의 시작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고통을 만납니다.
실패, 이별, 가난, 질병.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고통들을 삶에서 도려내고 싶어 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며, 분노하고,
남들보다 위로 올라가 이 고통의 중력에서 벗어나려 애씁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삶의 고난과 고통을 거부할수록 우리는 타인에게 더 잔인해집니다.
내 성공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마음의 성벽을 더 높게 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벽 안에는 ‘나’만 있을 뿐,
‘사랑’은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윤동주는 <서시>를 통해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고난을 피하지 마세요.
그 아픔을 당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세요.
문익환 목사가 말했듯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아파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에 찾아온 고난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 고난은 당신을 무너뜨리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 사랑을 완성했듯이,
우리도 우리 몫의 고난을 묵묵히 짊어질 때
서로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