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핀슨홀'의 그 소중한 인연, 정병욱과 강처중
우리는 윤동주를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시인’이라고 불린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으려면
신춘문예로 등단하거나, 이름난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 어떤 절차도 밟지 못했죠.
그는 그저, 시를 사랑해 틈틈이 습작하던
가난한 ‘문학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슬프게도 윤동주가 진짜 시인이 된 건,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1947년, 옥사 2주기를 사흘 앞둔 2월 13일.
윤동주의 마지막 시로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가 신문에 실리고,
이듬해인 1948년 1월,
그의 시 31편이 담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오면서
비로소 윤동주는 시인이 됩니다.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죠.
시인이라는 꿈이, 죽고 나서야 이루어졌으니 윤동주의 삶은 비극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이마저도 이루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날의 놀라운 기적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윤동주는
우리에게 영원히 잊힌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어떤 기적이었을까요?
어쩌면 윤동주의 그 비극적인 삶에 단 한 번 찾아왔던 결정적인 기적.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윤동주가 언제부터 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의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한대〉가 쓰인 때가 1934년,
그가 열일곱 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그는, 시인을 꿈꾸는 소년이었습니다.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새명동>>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직접 만들 만큼,
글쓰기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요.
밤새 등사용지에 글을 긁어대느라, 소년 윤동주의 손가락엔 늘 까만 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하죠.
동생 윤혜원 씨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시를 향한 갈망이 깊어질수록, 현실의 벽도 높아졌습니다.
1937년,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윤동주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진학해 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습니다.
시인이 되는 길을 걷고 싶어 했죠.
하지만 아버지 윤영석은 장남인 윤동주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문학’은 배고픈 학문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식을 고생길로 보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인쇄업, 회사원, 양계업, 포목상 등을 전전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그래서 늘 끼니 걱정했던 그로서는,
집안의 장남인 윤동주가 가장의 짐을 함께 짊어주길 기대했죠.
이 갈등은 몇 달 동안 이어졌습니다.
아버지의 퇴근 시간만 되면 윤동주는 집을 나가 밤하늘 아래를 헤매다 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결국 곡기까지 끊으며 단식에 들어갑니다.
문학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윤동주의 단호한 의지였습니다.
걱정이 깊어진 아버지는 장인어른인 김약연을 찾아갑니다.
“동주가 의대를 안 가겠다고, 밥도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약연은 도리어 아버지를 타이릅니다.
“동주가 원하는 대로 하게.”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역시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 두 분의 지지 덕분에
윤동주는 끝내 자신이 선택한 길, 문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연희전문에 입학한 첫 해에만 8편의 시와 5편의 동시, 1편의 산문을 써내려갈 정도로
가장 찬란한 시절을 맞이하죠.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던 그 시절은,
동시에 가장 잔혹했던 시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의 말과 역사가 차차 메말라가고 있었죠.
윤동주가 3학년이 되던 해에는
학교의 유일한 조선어 강좌마저 일본학 과목으로 대체됩니다.
그렇게 우리말은 학교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그동안의 습작 중 마음에 드는 시 18편을 추려
졸업 기념 시집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941년 11월 20일,
시집 맨 앞에 넣을 시 한 편을 새로 쓰죠.
바로 〈서시〉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처음에 생각한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는 겁니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일제의 폭압에 신음하는 병든 사회.
아버지는 아들이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윤동주는 시를 통해 조선인의 병든 마음을 위로하는,
'영혼의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자필로 세 부의 시집을 만든 윤동주는 곧장 스승 이양하 교수를 찾아가
시집 출판 여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양하 교수는 일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다며 출판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사상 통제가 극에 달한 시점에,
조선어로 된 시집이 검열을 통과할 리 없었죠.
게다가 윤동주의 시는 일제의 시각에서 보면 불온한 내용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시집을 내기도 전에 윤동주가 체포될 위험도 있었죠.
결국 출판은 무산됩니다.
윤동주는 육필로 만든 세 부 중 한 부를 가장 아끼던 후배 정병욱에게 건네주며 기약 없는 이별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흩어진 세 권의 시집.
두 권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졌고,
오직 하나.
정병욱에게 건네준 단 한 부만이 기적처럼 살아남게 됩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2년 후배였던 정병욱.
이들이 처음 만난 건,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습니다.
정병욱은 그날 처음 보았던 윤동주의 인상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윤동주의 성격은 참으로 대쪽 같았습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법이 없었고,
교복 단추가 기울어지거나,
양복바지 무릎이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습니다.
신발은 언제나 새것처럼 깨끗했죠.
특히 책을 대하는 태도는 유별났습니다.
종이가 뚫어질 듯 책을 정독했지만,
절대로 그 위에 밑줄 하나 긋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만큼이나, 그의 삶은 티끌 하나 없이 정갈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
두 사람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까지 함께할 정도로
깊은 우애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자필 시집을 정병욱에게 맡기고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1943년 7월,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찰나 일제 경찰에 체포되죠.
경성에 남은 정병욱에게도 비극이 찾아옵니다.
1944년 1월, 일제는 대학생들마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습니다.
정병욱에게도 '학도병' 징집 영장이 날아듭니다.
전쟁터로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
정병욱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가 맡기고 간 '육필 원고'였습니다.
고향 집으로 내려간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원고를 건네며 신신당부합니다.
"어머니... 이 원고는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죽어 못 돌아오더라도... 해방이 되면 이 원고를 꼭 세상에 알리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유언과도 같은 부탁에 원고를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쌉니다.
그리고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마루 밑 항아리 속에 깊숙이 숨깁니다.
이 야속한 운명은 끝내 두 사람을 영원히 갈라놓았습니다.
1945년 2월,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시인 윤동주는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전쟁터의 사선을 넘나들던 정병욱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문을 박차고 들어선 정병욱은 어머니를 끌어안을 새도 없이 다급하게 묻습니다.
"어머니! 그 원고... 제가 맡기고 간 그 원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머니는 말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안방 마루로 이끕니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낡은 마루장.
정병욱은 떨리는 손으로 마루장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어두컴컴한 흙바닥.
그 속에 덩그러니 놓인 항아리 하나.
정병욱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습니다.
혹시 습기 때문에 종이가 썩지는 않았을까,
벌레가 먹지는 않았을까.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겹겹이 싸맨 명주 보자기를 풀었습니다.
한 겹... 두 겹...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누런 원고 뭉치.
다행히도 멀쩡했습니다.
마치 어제 써 놓은 것처럼, 윤동주의 시들은 잉크 냄새를 풍기며 그곳에 살아있었습니다.
윤동주는 차가운 감옥에서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그의 영혼이 담긴 시는,
7년의 어둠을 견디고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병욱이 목숨 걸고 지켜낸 마루 밑 항아리.
그곳에서 나온 시는 총 19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초판본에는 총 31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12편의 시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정병욱만큼이나 윤동주를 사랑했던 친구,
강처중의 이름을 떠올려야 합니다.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핀슨홀’ 3층을 함께 썼던 룸메이트, 강처중.
그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날 때 남기고 간
40권이 넘는 책과 손때 묻은 앉은뱅이 책상,
그리고 졸업 앨범을 마치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윤동주는 일본의 좁은 육첩방에서 쓴 시들을 편지에 적어 강처중에게 보냈고,
강처중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 그 편지들과 시들을 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병욱이 윤동주의 초기 시를 '항아리'에 묻어 지켰다면,
강처중은 윤동주의 마지막 시적 절규를 '서랍' 속에 품고 있었던 겁니다.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가 된 강처중은 결단을 내립니다.
"내 친구 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는 당시 경향신문 주간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을 찾아갑니다.
무명 청년의 원고를 받아 든 정지용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모두가 변절하여 일본어로 시를 쓸 때, 끝까지 우리말로 내면을 닦았던 청년의 시.
훗날 정지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며,
윤동주를 "동지섣달에 피는 꽃",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이라 극찬하기도 했죠.
이윽고 정지용은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를 게재합니다.
무명 시인 윤동주가 세상의 빛을 보는 첫 순간이었습니다.
1948년 1월.
강처중은 정병욱이 가져온 항아리 속 19편의 시와,
자신이 보관하던 일본 유학 시절의 시 5편,
그리고 흩어져 있던 습작 7편을 모두 모았습니다.
시를 선정하고, 순서를 배열하고, 교정을 보는 것까지.
시집 발간의 모든 실무를 강처중이 주도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31편이 수록된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입니다.
강처중은 이 시집의 맨 끝에 '발문'을 남겼는데요.
이 글에는 우리가 몰랐던 윤동주의 따뜻한 인간미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가난한 친구들이 윤동주의 주머니를 노릴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자신도 넉넉지 않았으면서,
친구를 위해서라면 아끼는 시계까지 전당포에 맡겼던 사람.
강처중이 기억하는 윤동주는 고독한 시인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마음이 넉넉한 '큰형님' 같은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강처중은 그토록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발문의 끝을,
먼저 간 두 친구를 향한 피 끓는 절규로 맺습니다.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였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이렇게 절절한 글을 남겼지만,
안타깝게도 강처중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그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고,
전쟁 중 행방불명되어 '금기의 인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념이라는 잔인한 칼날은 친구를 위해 헌신했던
그의 마지막 편지마저 찢어버렸습니다.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개정증보판이 나왔을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된 채 출간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윤동주가 시를 쓰고,
정병욱이 항아리로 지켜내었으며,
강처중이 그것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시대의 어둠을 함께 건넌,
세 친구의 위대한 우정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던 거죠.
친구들의 눈물겨운 우정 덕분에 기적처럼 세상에 나온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 시집이 나옴으로써 윤동주는 비로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윤동주의 삶을 바라보면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윤동주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었더라면.
그리하여 문학을 하겠다며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타국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에게, ‘시인’이라는 단어는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나 다름없는 말이었습니다.
저 아들의 꿈이 아들을 죽인 비수도 돌아왔으니,
'시'라는 글자가 얼마나 사무치게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윤동주를 시인이라고 부르기 전에,
친구들이 항아리 속 원고를 꺼내 책으로 엮기도 훨씬 전에,
가장 먼저 윤동주를 시인이라고 불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었습니다.
1945년 3월6일 윤동주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석 달이 지난 6월 14일.
아버지는 아들의 무덤 앞에 비석 하나를 세웁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이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미리 마련해뒀던 귀한 흰 돌을 내어준 것이었죠.
아버지는 그 비석 앞면에 떨리는 손으로 이렇게 새겨 넣었습니다.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
시인 윤동주의 무덤.
그토록 반대했던 길.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원망했을 법도 한 그 길.
하지만 아버지는 싸늘하게 식은 아들 앞에서 비로소 아들의 꿈을 인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