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진단
위암 3기
이 것은 오늘 다학제 진료에서 내게 최종적으로 주어진 병명이다.
CT 판독 결과를 듣기 위해 보호자를 동반해서 외래에 들어오라는 문자를 받은 날로부터, 정확히 16일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위 전체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고, 수술 중 제거한 60개의 림프절 중 16개에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나는 ‘암 환자’로 등록되었다. 말 그대로, 공식적인 암 환자.
이 아득하고도 현실감 없는 이야기는, 처음엔 실감 조차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덧 내 삶 한가운데로 들이닥쳤고, 불과 16일 만에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직면해야만 하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이 상황은 다시 꿈이 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는 문이 이미 닫힌 것이다.
“뭐라고요? 위 전체를 떼내야 한다고요?”
“6개월밖에 못 살 수도 있다고요?”
“그렇다면… 위를 떼내는 건 왜 해야 하나요?”
“치료는 왜 받아야 하죠?”
“차라리 그 6개월 동안 화끈하게 놀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고, 그렇게 끝내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요?”
불과 2주 전 외래 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갔었는데, 차마 그 생각들을 다 내뱉지도 못한 채 차분하면서 단호했던 내과의의 말을 경청해야 했다.
“그렇다면 화끈하게 놀 수 있는 기간은 채 3개월도 되지 않을 겁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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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항암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암은 정복되지 않은 영역이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된 경우에는 수술적 치료와 예방적 항암을 동시에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말기암 환자들에게 항암 치료의 목적은 암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암을 억제하고 기대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것에 있다. Living with cancer.
기대 수명이 6개월인 사람에게
“항암 치료를 하면 고통스럽겠지만, 1년은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1년’을 위해 항암을 받아들인다. ‘산다’는 것이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그만큼 삶은 아찔할 만큼 매력적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얻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과제가 된다. 비교적 건강했던 세포까지 함께 파괴하는 항암과 맞바꾸어 그 대가로 얻는 생의 연장은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일까?
아니면 침대 위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그저 숫자로만 더해진 삶의 조각들일까?
그렇다면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해야 내 삶이 나로서 완성될 수 있을까.
무엇이 나를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글쓰기에서 찾기로 했다.
글은 사유의 산물이고, 생각의 형태다.
수많은 시간 동안, 무의식처럼 떠돌던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형태를 갖추고, 형태를 갖춘 생각은 비로소 힘을 가진다.
힘을 가진 생각은 울림이 있고, 그 울림은 파동이 되어 시대와 세기를 넘어 울려 퍼질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아, 다시 또 다른 사유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의 말처럼 우리는 젊고 건강할 때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능력과 성능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마음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보다 나은 미래의 풍족함을 위해 몇 년이고 오늘의 자원을 기꺼이 투자한다. 삶의 시야와 한계를 몇 년 단위로 판단할 때 어쩌면 인간에게는 그것이 무한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이때 우리는 성취감과 같은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삶의 시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때 비로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돌아보게 된다. 내게 아직 남은 것은 무엇인며 내가 지금껏 가치 있게 여겨 정진하고 이룬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서 내가 혹시 소홀히 한 것은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각자마다의 시간은 다르지만 모두 언젠가는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우리가 아직 오지 않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생명력 가득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언젠가 직면할 그 순간까지 온전히 나로서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내 삶을 사랑했고 온 노력을 다해 가꾸었으며 그 길에 피어난 풀들과 꽃들을 아꼈다고 기억하고 싶다.
이 순간 내가 마주하는 삶에 대한 감정의 기록이 얼마만큼의 울림을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내 삶 속에 뿌리내려 살아온 나의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이게 만큼은 이 글이 종종 나를 기억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길 바라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글이 단순한 병상일기가 아닌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복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학제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 해인이를 보았다. 눈물을 꾹 삼켜가며, 이 고통스럽고 믿기지 않는 현실을 그 애는 혼자 조용히 견디고 있었다. 나는 해인이를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그 품 안에서 내게도 따뜻한 위로가 흘러왔다.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날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안으며 따뜻했고. 기대했던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담담히 서로를 응시하고, 손을 맞잡은 채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