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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진 Nov 10. 2022

말레이시아 아내와 헝가리에서 외국계기업에 다니는중입니다

나의 삶이 다뉴브강까지 흘러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해외연수 한번 없이 외국계 기업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것도 그리고 내가 전공했을 때 들었던 그 기업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 인생을 외국인 아내와 함께할 것이라고는 아내에게 고백을 할 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학예사를 꿈꾼 적이 있었다.

고향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국립박물관과 비엔날레가 있었고 학교에서는 심심하면 그곳으로 소풍이나 견학을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공원이나 넓은 주차장을 마치 공터처럼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드나들었기에 심리적으로도 매우 가깝기도 했다.

타 과목에 비해 시간을 많이 투자한 국사가 내리막을 찍으면서 나의 대학 진학에 영향을 미쳤고

그제야 나는 내가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 좋아하던 세계사와 온갖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박물관들의 소장 및 전시품들에 대한 나의 관심도는 성적표와 함께 땅으로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좋은 학예사가 되는 것이 상당히 어렵고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물관의 고즈넉함과 과거의 이야기로 가득 찬 유물들과는 아쉽게도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학예사를 접고 선생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더욱더 말이  됐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선생님들과 똑같아질 거라는 것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었고 임용고시 또한 만만하게   없었다. 그때는 시험을 보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이상 인생에 있어서 시험이라는 리스크에  인생을 걸고 싶지 않은 직종을 가기로 했다.

물론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않고도 선생님 혹은 학원 선생님 등으로 넘어갈   있었겠지만

어느 하나 특출 나게 잘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말 잘한단 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었기에 이것도 포기했다.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고서야 나는 현실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거나,

당장 돈이 될 수 있는 곳들을 가, 나, 다 군에 전부 집어넣었다. 항해사가 되어 군대를 가서도 돈을 벌어볼까 생각해서 내 표준점수보다 조금 높은 곳으로 지원했지만 예비에서 다행히 탈락했고,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정말 창피한 이야기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갔다가 오래 달리기에서 과락당했다. 재밌는 사실은 단거리에서는 1등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이 첫 번째로 판가름 나는 대학 지원에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나는 짧은 거리를 주행하는데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이후에 회사에서 업무를 할 때도 오랫동안 하나의 팀에 있지 못했고, 항상 새로운 것들을 찾으며 어떻게든 빠르게 흡수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부러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왔었다. 한번 부러지고 나니 이제는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지만 가끔은 또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튼 내가 외국인 아내와 외국계 기업을 다니며 외국에서 지내는 것의 시발점은

유일하게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기를 원한 아내 덕분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 남자와 외국인 여자가 지금처럼 사귀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한국에게는 코타키나발루 말고는 생소한 나라였으니까.

지금은 중국에서 화학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의 여름방학 경제학 스터디클럽 참가 권유를 뿌리쳤다면 우리는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지만 나는 군대를 갔고 아내는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만날 일이 없어야 하지만 나는 전역을 했고 아내는 MBA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그 친구의 초대로 우리는 만나게 됐고 그렇게 나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을 걷게 됐다.


한참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다른 친구의 추천으로 지금 다니는 곳에 지원서를 단 하루 만에 마감 직전에 제출했다. 당시에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아쉬울 거라는 친구의 도발에 넘어간 꼴이었지만 아내의 교정과 친구의 도발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먹고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한참을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또다시 도화살이 도졌는지 아니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나는 헝가리에서 새로운 포지션으로 일해보는 것을 원했고 그렇게 지원했다.

많은 이들이 도와준 덕분에 와서 정착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고 일도 아직까지는 재밌게 하고 있다.


지금 와서야 내 처지를 생각해보니 무엇하나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흘러 들어왔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려고 하지 않았고,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연고도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 조금 더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공무원이 되려고 한참을 공부하다가 광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게 내가 가슴속 깊이 생각해왔던 나의 안전한 인생 루트였으니까.

그런데 오차범위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빗나간 인생을 살고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갈지 이제는 예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흐르는 강물을 따라 움직이려고 한다.

필요하면 또다시 강바닥으로 뛰어들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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